[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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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밥’처럼 순한 영화

허진호 감독의

문득 문득, 예전에 봤던 영화가 떠올라 머릿속을 가득 채울 때가 있죠. 제겐 가 그런 영화입니다. 수첩을 뒤적였더니 98년 2월에 이 영화를 봤더군요.

쌀쌀한 날에 영화를 봤는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스크린을 멍하게 바라보며 ‘아, 좋구나...’ 하고 한참을 앉아 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곤 집에 돌아왔는데, 참, 느낌이, 그냥 일상적인 일을 하면서도 그 느낌이 영화보기 이전과는 좀 다르더군요.

이제와 생각하니 이 영화는 ‘가족’, ‘기억’, 그리고 내 개인적인 여운으로 남았습니다.

90년대 많은 영화는 ‘커플’이 중심이었죠. 92년인가, 가 나온 이후로. 그 이전만 하더라도 가족은 영화의 중심이었는데 어느 샌가 사랑하는 두 젊은이 외엔 별로 중요한 사람들이 없는 형식이 주가 된것 같아요. , , , 처럼.

그런데 이 영화에서 가족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정원은 영화 앞머리에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운동장에 혼자 앉아 있곤 했던 유년시절을 떠올립니다. 어린 남매를 자기 손으로 키운 홀아버지와 함께 사는 정원이, 여동생 정숙이는 가끔 아버지와 오빠가 사는 옛 집을 찾아와 이런 저런 이야기도 하고 밥도 같이 먹죠.

아마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중 하나일 수박씨 뱉는 장면을 생각하면 이 두 남매가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역시 친밀한 인물입니다. 이 영화의 아버지는 함께 부엌에서 찌개를 끓이고(심지어는 아들, 딸보다 더 잘 끓이시죠), 파를 다듬으며, 가족사진을 찍어주고, 이불 속에서 흐느끼는 아들의 방문을 차마 열지 못하고 한숨을 쉬며 사라집니다. 아버지 하면 떠오르는 그런 두려운 어른이라기 보다는 친근한 연장자로 그려지죠.

그래서, 정원이는 죽음을 준비하며 아버지를 위해 리모콘 작동법과 현상기 작동법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폴라로이드로 찍어둡니다. 아버지가 물려주신 사진관을 다시 아버지가 운영하셔야 하니까요.

정원이에게 가족이 차지하는 비중은 다림이가 차지하는 비중만큼이나 높습니다. 이게 별스럽게 느껴질 정도라니 새삼 놀랍네요.

그리고 말이죠, 이건 여운이 상당히 큰 이야기입니다.

영화의 일상적 묘사가 상당히 섬세하다보니까 나의 일상생활 모습과 영화가 어느 순간, 겹치게 됩니다. 그러면 그때 정원이의 느낌은 어땠을까, 어떤 마음이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영화의 여운이 되살아나는거죠.

정원이가 아버지께 비디오 작동법을 설명하는 장면에서 많은 분들은 웃으셨지만 곧 웃음을 거두게 되죠. 정원이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니까. 우리도 부모님께 기계작동법을 설명해 드리며 자주 답답함을 느끼곤 합니다. 아무리 가르쳐드려도 못 알아들으시니 짜증이 나고 말이죠. 그런 공감할 수 있는 상황에 정원이의 개인적 비극이 겹치는 순간, 그 짜증은 슬픔으로 변합니다. 맑은 물이 담긴 컵에 떨어진 잉크방울처럼, 점점 온 마음에 어떤 감정이 퍼져나가는 것이죠.

이런 갈수록 파문을 더하는 담담한 묘사가 감정과잉으로 흐를 수 있는 소재를 단아하게 만듭니다. 단 한번, 감정과잉으로 흐르는 마지막 부분 정원의 나레이션도 크게 눈에 거슬리지 않는 것은 이런 파문이 가장 커지는 부분이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리고, 기억이죠. 정원이의 기억에 남은 다림이, 다림이의 기억에 남은 정원이, 정원이가 자주 되새기는 옛날 기억들, 지원이와의 추억. 기억에는 감정이 녹아있습니다.

다림이가 정원이에게 캔 입구 부분을 닦아 건내는 장면, 시무룩하게 돌아서던 다림이, 툇마루에서 발톱을 깎다 드러눕는 정원이의 뒷모습, 정숙이와 함께 수박씨를 뱉는 정원이, 그리고 사진관 유리창에 돌을 던지는 다림이의 모습, 다림이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 만년필 촉을 물컵에 담가 씻던 정원이.

이 모든 건 거기 묻어나는 감정들 때문에 예사로 지나치지 못하게 되고 영화가 끝나도 기억 속에 앙금처럼 남습니다.

이 영화를 가끔 되새겨보고, 다시 봐도 처음의 느낌은 바래지 않습니다.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밥처럼 순하지만 날카로운, 일상의 단면이 거기 있기 때문이죠.

마치 내 이웃 아저씨의 삶을 담 넘어 본 일상의 한 조각을 걸어놓은 듯한...

※우희정 기자는 영화에 관심이 많습니다. 99년 부산대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부대문학상 평론부문에 평으로 당선되기도 했습니다.

부산대 신방과 문학모임 ‘추상’ 홈페이지 연재란에는 유리핀으로 등록된 작가이기도 합니다.

우희정 기자 my-idah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