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생인 엄마는 열아홉에 결혼했다.

지금 사는 집이 시집오던 해에 지었다고 하니 올해로 72년 되었다. 집도 엄마도 세월의 흔적을 비켜 갈 수 없는 듯, 어디 한군데 성한 곳이 없다. 엄마의 구부러지고 야윈 빛바랜 몸처럼 덩치 큰 집도 여기저기 허물어져 금방이라도 내려앉을 것만 같다.

약간의 죄책감이 느껴진다. 어쩌다 한 번씩 먹을 것을 싸 들고 가 호들갑을 떨거나 생색을 내며 쥐여주는 용돈 따위로는 엄마와 엄마의 집에 느끼는 미안함을 대신할 수 없다. 엄마도 어쩌면 자식들이 바리바리 싸 들고 오는 음식과 용돈으로는 당신이 바친 세월의 무게가 위로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겉으로는 고맙고 대견하다며 좋아했겠지만, 속으로는 ‘이깟 게 다 무슨 소용이냐, 푹푹 찌는 한여름에조차 창문 한 번 시원하게 열어놓지 못하고 사는 독거노인의 외로움과 두려움을 너희들은 모를 것이다’라며, 떠나가는 자식들을 향해 훠이훠이 손 흔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결심했다. 엄마에게 새 집을 선물하자? 아니, 내가 가성비 좋은 전원주택을 짓고 엄마랑 함께 살겠다고 결심했다. 다행히 다른 형제들도 좋아라. 찬성해주었다. 적잖은 건축비를 감당해야 하고 도시 생활을 정리해야 하니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맘 한편으론 이제야 엄마를 위해 뭔가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무겁지는 않았다. 엄마도 새 집에 대한 기대가 있는 듯 고마움 반 걱정 반의 표정으로 새 집이 지어지는 과정을 내내 지켜보았다.

측량사가 다녀가고 토목공사가 시작되던 그 날도, 나는 새벽같이 차를 몰아 집으로 갔다. 마당은 벌써 공사 차량과 마을 사람들로 소란했다. 마을과 떨어져 있어 외딴집이나 다름없는데, 누구네 집 짓는다는 소문이 돌면서 평소 얼굴 보기 힘든 이웃들까지 찾아온 거였다.

마당으로 들어서는 내 차를 본 엄마가 손짓하자, 모여 있던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내 쪽을 바라보았다. ‘엄마가 동네 사람들에게 새 집 지어주는 딸이라고 자랑했을 텐데,’ 차에서 내려 멋쩍게 웃으며 걸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한 아주머니가 나를 가리키면서 엄마에게 물었다.

“저 딸이 집 짓는 돈 대유?”

나는 내심 기대했다. 엄마가 나를 자랑스럽게 소개하기를. 그러나 엄마는 내 예상과 전혀 다른 대답을 했다.

“아뉴! 우리 아들이 집 짓는 거유.”

순간 나는 엄마의 눈을 피했다. 밀려오는 서운함을 엄마가 살아온 삶에 대한 자존심의 표현이니 이해하자고, 어색하게 웃었다. 저녁 무렵 마을 사람들이 모두 돌아간 뒤 엄마도 뭔가 마음에 걸렸는지 내게 말했다. ‘여태 있다가 아들이 아니라 딸이 집 지어준다고 하면, 사람들이 흉볼까 봐 그랬다’ 엄마의 솔직한 속내를 듣고 잠깐, 새 집의 물주를 아들로 바꿔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심란했지만, 나는 처음 결심을 바꾸지 않기로 했다.

엄마는 이름 끝자리에 흔하게 자(子)자와 남(男)자를 붙이던 시대에 태어났다. 여성들의 투표권을 외치던 페미니즘 1세대고, 남아선호사상이 극단의 정치 상황으로 치닫던 세대에 아들을 낳아야만 가문이 당당해지고 집안의 위신이 살아, 여성 스스로 가문의 영광을 위해 앞장서야만 했던 그런 시대에 살았다. 그러나 세상은 변했고, 유교 사회가 만들어낸 종교의식과 가부장제는 폐기되어야 할 유물이 되었다.

그렇다면,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평등, 성적 해방을 외친 페미니즘 2세대의 의식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안타깝게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그냥 가정 안에서의 아들과 딸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여성과 남성의 문제로 보지 않는다. 우리 딸, 우리 아들이라는 쉬운 말버릇에서 누가 페미니즘에 대한 혐오와 갈등을 조장할 수 있을까. 그러나 사랑스러운 아들과 딸로 불리며 자라는 동안 우리는 여자와 남자라는 생물학적 성의 범주에 자연스레 구분되어 노출되고, 엄마가 애정을 듬뿍 담아 아들 또는 딸이라고 혀 짧은 소리로 부르다 보면, 우리 세대가 원하는 성적 해방은 요원할지도 모른다.

엄마가 가정에서 버릇처럼 말하는 딸과 계집애, 여자애라는 호칭은 자칫 남성과 다르다는 평등의식을 방해할 수 있다. 말은 화자의 의식에서 나온다. 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화자의 사회적 환경이 만들어주고 생물학적 모성을 통해서 길러진다.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소설가 시몬 드 보부아르는 ‘제2의 성’에서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남성 지배의 사회에서 여성은 주변인에 불과하고 신비화되어가고 있다고 말한 의미를,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까지 소환해 되새기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사회적 편견과 배제에 맞서야 하는 여성의 역할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엄마가 살아온 시간을 탓할 수는 없다. 엄마는 엄마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냈다. 내가 할 일은 엄마가 당당하게 부끄러워하지 않고 아들도 아니고 딸도 아닌 우리 넷째 경희가 지어준 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를 선물해주는 것이다. 그놈의 체면이나 허울 따위는 벗어던지고, 당신의 권리를 찾아 맘껏 표현할 수 있는 평등한 자유를 말이다.

>> 이경희 작가는…

- 63세, 우두동 출신

- 탑동초, 당진여중, 당진여고 졸업

- 2008년 [실천문학]에서 단편소설 <도망>으로 등단

- 산문집 <에미는 괜찮다>,

장편소설 <모란시장>, <기억의 숲>,

소설집 <도베르는 개다>, <부전나비 관찰기>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