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다리는 가족품에 돌아오면 생일날, 못오면 제삿날
만조 잔잔한 물결, 왜목 앞바다에서 동력선을 타고 곧바로 뱃머리를 북쪽으로 돌렸다. 캐터필러 소리도 경쾌하게 스크류가 차내는 포말을 뒤로 한채 한여목을 지나면 경기도 해역으로 접어든다. 육도를 옆으로 두면 헬멧을 벗어 엎어놓은 듯 둥근모양으로 다가오는 섬. 출발한 지 한시간. 풍도는 녹음으로 덮인 채 고요하다. 섬은 수많은 역사를 지켜보며 오늘도 묵묵하다.
물빛은 쪽빛으로 수심을 말해주는데 깊고 깊은 바다밑 저 아래엔 1894년 7월23일 청·일전쟁에서 패전한 청나라 군인들의 잠든 영혼이 격침된 군함들과 함께 어쩌면 보물을 간직한 채 처참했던 전쟁의 역사를 먼훗날 증언하겠다는 듯 침묵하며 누구의 접근도 거부한 채 해저를 지키고 있으리라. 더 오래전엔 해적 출몰지역이였다 하니 예나 지금이나 항로의 요충지였음을 확인하는 사건들이며 때문에 여기에 뱃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어 살게 되었나보다.
마을 산엔 커다란 은행나무 한그루가 500년 마을의 역사를 지켜보며 수호신으로 지금도 꿋꿋한데 이곳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을 나무 수령보다 더 오래 전이었을 것이다. 최성기에는 250가구나 살았고 30년 전만해도 초등학생수가 80명이었으나 지금은 50가구에 학생수는 8명으로 줄었단다. 조운선의 역할이 줄어들면서 수입원이 없어지고 점점 쇠퇴하여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한다.
지금도 이 뱃사람들의 애절한 사랑노래가 애조띤 가락에 실려 남아있다.
풍도라구 풍도라구 생겼걸랑 / 석이라도 있이 생기지
난지라구 난지라구 생겼걸랑 / 석이라도 없이 생기지
늙은 사공의 기침소리와 함께 서방님은 불려나가고 바람소리 점점 세차 어수선한데 저승사자에게 끌려가듯 꿍깃거리며 떠난 서방님 누웠던 자리에 남은 체온을 느끼며 풍도이기 때문에 별나게 겪어야하는 뱃사람 아낙의 서러움을 주체하지 못하고 한맺힌 노래를 불러야했던 풍도의 여인들…
지금은 방파제를 쌓아 훌륭한 정박지(“석”(席)=뱃석)가 있지만 이것이 축조되기 전엔 풍도에 배를 정박할 만한 곳이 전혀 없었다. 때문에 바람이 불면 20~30여리나 떨어진 소난지도에 피항하는데 사랑하는 아내와 운우지락을 즐기다가도 바람만 불면 범 만난 사람 도망치듯 잠자리를 박차고 피항길을 떠나야만하니 못다한 사랑이 얼마나 아쉬었으면 사람도 아닌 섬을 시앗처럼 미워했을까.
난지도에 뱃석이 없었다면 그나마 피할 곳도 없었을 텐데 난지도가 서방님을 빼앗아 가버렸다고 생각하며 “풍도라구 풍도라구 생겼걸랑 석이라도 있이 생기지”하며 기왕 생기려면 정박지라도 있도록 생겼으면 하는 바램과 한탄을 맺히게 노래했다.
또 재미있는 것은 이 섬에는 생일날과 제삿날은 같은 집이 많으니 여기에는 애환이 엇갈리는 사연이 있다.
조운선에 화물을 싣고 떠나면 빨라야 일주일, 늦으면 한달씩 걸리니 험한 뱃길을 떠나보낸 아낙들이 서방님 기다리는 마음이야 오매불망 아니겠는가. 운좋게 날씨 좋은 날 배가 고향인 풍도 근처를 지나게 되면 잠깐 마을앞에 닻을 내리고 포구에 내려서면 돌쇠네, 억쇠네 엄마들이 우루루 몰려나와 방긋방긋 서방님을 맞이한다.
섬집들은 담장을 돌로 쌓았고 대문 대신 장대 하나 걸치는 게 ‘문을 잠궜으니 들어오지 마시라’는 뜻인데 거기에 난데없이 하얀 앞치마가 화사한 햇빛과 산들바람에 펄럭이는 진풍경에 빙그레 웃을만한 뜻이 숨어있는 것을 풍도사람 말고 누가 또 알까?
‘낭군님을 맞이하는 시간이니 방해하지 말아주세요’라는 이 섬에만 있는 미풍양속인 것을, 넌즈시 이웃 할머니에게 맡긴 아이들은 갑자기 엄마를 떨어져 칭얼대는데 돌쇠와 억쇠를 업은 이웃할머니께서 ‘돌쇠야 너도 동생 보고싶지? 억쇠도…’하며 달래준단다. 그로부터 일년 후 어김없이 돌순이와 억순이가 태어나니 생일날이 같더라나 어쨌다나, 아무튼 경사가 아니랴.
뱃사람들은 하루 일기를 예보할 줄 안다고 한다. 해가 질 때 구름속으로 지면 내일은 비가 오고 달마루가 지면 날씨가 좋지않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러나 아무리 경험이 많다하나 요즘같은 일기예보나 첨단장비가 없고 바람결에 따라서 왕래하는 범선이니 언제든지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어 해난사고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갑자기 몰아닥치는 태풍은 노련한 사공이라 해도 어쩌는 수가 없었다.
이들은 사랑하는 젊은 아내와 귀여운 자식들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바닷속 깊이 불귀객이 되어 소식이 없고, 관행처럼 집나간 날로 정하여 제사를 모시니 하늘이 무너지고 억장이 찢어지는 뱃사람 아낙들의 서러움을 그 누가 알며 대신할 사람 어디 있으랴. 그래서 한배를 탔던 사람들의 제사날이 같을 수밖에.
풍도는 농사 지을 땅도 없고, 바다 또한 갯벌이 없어 수산자원이 없는 형편이라 일찍이 화성군에 소속된 아주 작은 섬 도리도에 유랑하며 낙지며 굴, 조개 등을 캐어 생활터전으로 자리매김한 지가 오래다.
행정구역은 화성군이지만 안산시 풍도동 사람들의 터전이 된지 150년이다. 화성군 사람들과 점유권 분쟁은 계속되고 법정다툼까지 벌어지고 있다 하니 이 또한 고달픈 생활의 연속이다.
척박한 환경을 일구어 생활하고 교육을 시켜 지금도 훌륭한 인물을 키워내 고향을 지키고 행정구역이 다른 도리도의 권리도 지킬 수 있었다고 한다. 불에 달군 쇠가 단단하듯이 이들 또한 그렇게 개척하고 지키며 더 좋은 환경으로 가꾸어 갈 것이다.
바닷가에 사는 뱃사람의 후예들은 같은 환경과 처지로 왜목마을 인맥도 그들과 무관하지 않다. 한번쯤 역사기행이나 민속풍물체험으로 가 볼 만한 곳이다.
살펴본 사람 : 조선형(왜목마을 관광단지 유치추진위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