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는 마당이 놀이터였다. 안마당과 바깥마당은 집안과 밖의 경계에 있으면서 가족과 마을 공동체간의 완충 지역이고 교류에 장이였다. 결혼식, 잔치 같은 대소사나 공동으로 일을 하는 공방의 역할도 하고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 역할과 윳놀이등의 놀이터 역할도 하는 다용도 공간이였다. 마당의 잔디는 사실 서양의 풍습이다. 한옥에 관한 책에 보면 뒤뜰에 응달은 고기압이고 마당의 데워진 맨땅은 저기압이여서 대청마루를 통해서 흐르는 찬 공기는 천연에어컨 역할을 하였다고 하니 만일 마당에 맨땅은 잔디가 없어 유용했다. 또 잔디가 있었다면 땅따먹기 놀이나 곡식을 터는 일은 못 했을 것이다. 마당은 비어있어서 유용한 곳이였으며 여러모로 사용될 수 있는 다용도 공간이다.
요즘 드라마를 보면 재판장이 많이 나온다. 검사는 늘 보자기에 서류를 싸서 들고 온다. 자세히 보면 그 서류의 양이 많아 일반 가방에는 들어가지 않을 것이고 케리어 정도는 되야한다. 재판장에 검사가 서류가 든 케리어를 끌고 들어오는 장면은 잘 상상이 가질 않는다. 예전 어머니들의 머리위에는 온갖 것을 싼 봇따리가 올려 있었다. 보자기는 어떠한 모양의 물건이든지 다 싸서 들을 수 있는 가장 원시적인 도구이다. 보자기는 마당과 마찬가지로 여러 용도로 사용되기 마련이다. 뭐든 다 덮고 싸고 묶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외국에서는 우리나라 포대기가 유행이란다. 포대기는 아이를 업을 때 쓰는 보자기라 할 수 있는데 크고 두툼한 보자기에 양쪽 끝에 넓은 끈을 덧댄 구조이다. 이 포대기도 육아에 여러모로 쓸 수 있는데 아이를 눞일 때는 깔개로, 또 싸개로도 덮개로 쓸 수 있다. 이런 장점은 서양의 유모차, 육아멜빵은 도저히 따라올수 없는 장점이다.
이렇듯 마당과 보자기는 비어 있어 유용하고 간단한 구조이기 때문에 주 용도 이외에 여러 용도로 사용될 수 있다.
싱가폴 도심 한가운데엔 축구장 3배 정도 넓이의 잔디밭에 축구장, 테니장, 크리켓장들이 있다. 뜬금없는 이 광장은 싱가폴의 국가적 행사가 치러지는 기념 광장인데 평상시에는 시민들의 운동공간으로 쓰인단다. 어찌보면 우리나라의 광화문 광장이나 여의도 광장과 비슷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싱가폴의 광장이 오히려 우리네 마당과 더욱 비슷하다. 상시적으로 사용되고 또 특별하게 사용되기 때문이다.
당진에는 이런 마당이 있는가? 시청 앞 공원, 신터미널 광장, 고대 공설운동장 모두 접근성과 용도면에서 미진한 바가 있다. 예전의 키노키노 극장 뒤의 땅을 당진시에서 매입하여서 당진 도심의 마당으로 쓰자고 주장한 바가 있었는데 이제 도심에서 하다못해 월드컵 거리응원이라도 할 열린 마당이 있는가 싶다.
우리는 빈공간을 두고 보지 못하는 DNA를 가진 것이 분명하다. 빈 땅에는 주차장이라도 세우고 용도를 부여하고 싶어 안달이다. 생각해보면 용도를 지정하고 그것을 관리하는 것이 자체가 권력이다. 용도를 지정하는 것은 공간에 이름을 붙이는 작업이다. 권력자는 공간에 이름을 붙혀 용도를 제한하여 사용자의 자유를 제한하는 자이다. 결국 우리가 빈 공간을 두고 보지 못하는 것은 권력욕이나 독점적 소유욕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제는 행정에서부터 공공시설의 용도를 지정하는 일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긴 길을 차도와 인도, 주차장으로 구획하여 나누는 순간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은 벌금의 대상이 되고 구획한 자에게 단속의 권한이 생긴다. 또 같은 공간이라도 ‘청소년문화의 집’으로 명명하는 순간 사안의 경중과는 관계없이 청소년에게 사용의 우선권이 주어진다. ‘문예의 전당’이라고 이름 붙혀지는 순간 공익적인 행사라 하더라도 문화적인 요소를 넣지 않으면 대관이 안된다. 마치 보자기를 가방으로 만드는 순간 공처럼 둥근 것은 들어갈 수 없는 것과 같다.
비워져 있기 때문에 오히려 유용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