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상에서 파는 육순청춘
나이 육십에 배운 ‘뭐든지 하면 되더라’
“그런 걸 왜 물어? 아직도 애덜인 걸.”
해가 낮아져 더 뜨거워진 가을 땡볕 아래 어른 머리 만한 작은 지게소품들을 손에 들고있던 손낙서(68세) 어르신은 나이부터 묻는 질문에 일없다는 듯 무심히 대답했다.
동네에 가면 아흔, 아흔 넷 되신 분들도 많은데 자신은 아직 나이 내세울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손낙서 어르신이 하는 일은 전통지게를 소품으로 만들고 그것을 손수 내다 파는 일이다.
어르신이 파는 소품 지게는 크기만 작을 뿐 농가에서 쓰는 여느 지게와 진배없다. 작은 대나무 겉껍질로 만든 바지개와 짚을 가지런히 짜서 만든 등판, 양어깨에 끼는 밀삐, 소나무를 잘 깎아 만든 지게, 지게를 세워놓는 작대기... 실제 지게를 이루는 모든 것이 있다.
바지개가 아이 손바닥만한 가장 작은 지게는 1만원, 그보다 조금 더 큰 것은 2만원, 더 큰 것은 3만원이다. 예상했던 것보다 비싸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어르신은 이렇게 말한다.
“잘 모르는 사람덜은 비싸다구 혀. 근디 말여, 이눔이 암만 작어두 맹그는디 꼬빡 하루란 말여. 크거나 작거나 모도 하루가 걸린다니께. 그러니께 비싼 것두 아니지. 안그려?”
말하자면 지게값은 어르신의 하루 품삯이다.
어떤 사람들이 사나요? 많이들 사나요? 혹시 시골서 살았었거나 지게 매던 아버지에 대한 향수 때문에 사는 것은 아닌가요?
“아녀. 보통은 애덜 교육시킬라고 산디야. 지게가 이렇다 허구 말여. 아니먼 꽃꽂이용으로 쓴디야. 작대기로 세워놓고 마른 꽃덜 꽂아노면 보기도 좋디야.”
그때쯤 자가용을 몰고가던 젊은 아줌마 한 분이 길 옆으로 차를 잠시 대더니 만원짜리 지게 하나를 사가지고 간다. ‘할아버지 많이 파셨슈?’ 사거리에서 차가 밀리는 동안은 안면있는 사람들이 안부를 묻고 가기도 한다.
그런데 지게를 판다는 곳이 좌판이랄 것도 없는 한 뼘 공간이다. 당진읍 탑동사거리 한쪽에서 아이 키만한 제일 큰 지게에 조그마한 지게들을 조롱조롱 매단 것이 전부다.
흙먼지 폴 폴 날리는 포장도로 갓길. 뒤쪽 상가에서 내건 간판이 한낮의 가을볕을 받아 드리운 인색한 그림자 한쪽이 어르신이 임대받은 유일한 공간이다. 글쎄, 임대해준 사람은 없지만 임대료로 다리품은 꼭 팔아야 하니 분명 거저는 아니다.
앉을 만한 자리 하나도 없이 왼종일 뙤약볕과 먼지 아래에 선 채 어르신의 얼굴은 이미 검게 그을렸다.
하긴 하루에 두세 번씩 어르신이 자리를 뜨는 시간이 있긴 하다. 버스비도 아깝고 해서 점심을 밥 대신 빵으로 먹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되게 체하고서는 꼬박 꼬박 집에 들어가 식사를 챙겨 드시고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들어간 김에 지게도 만들다 나온다. 어르신댁은 고대면 진관리 978번지, 방앗간 근처다.
아침 8시쯤 버스를 타고 나와서 10시 넘어서 들어갔다가 다시 오후 1시쯤 나오고 3시쯤 또 들어갔다 나온다.
어르신이 이 탑동사거리에 장사터를 마련한 것은 작년이다. 그 전에는 버스나 자전거를 타고 안가본 데 없이 당진군내를 누비고 다녔다. 서산까지 나가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다리품을 조금이라도 아낀다고, 차가 많이 밀리는 이곳 탑동사거리에 서있기로 한 것이 경제적인 착안이라면 착안이었다. 요즘도 점심을 먹고 난 후 잠깐씩은 여기저기 다니기도 한다. 그래서 어르신께는 명함도 있다.
이 분이 처음 지게 만들기를 시작한 것은 한 육칠년 전 농사일로 몸을 혹사해 허리를 다친 뒤부터였다.
“생 일 (논일) 허는디는 넘헌티 뒤지지 않었지. 보질(남의 일)도 넘 못지않게 했구. 근디 그게 몸을 너머 막 썼나보아. 허리를 꿈쩍두 뭇허게 돼버렸으니께...”
한 3개월 꼼짝없이 누워있다가 간신히 몸을 일으켰는데 다시 농사에 손을 댔더니 아픈 데가 자꾸 도졌다. 그 참에 어르신은 농사일을 아예 큰아들에게 물려주고 말았다. 그리고는 소일삼아 집에 있던 지게를 본 따 작은 지게를 만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자꾸 주위서 달라는겨. 그눔 괜찮다구 말여. 그러다보니께 두 개 시 개 더 맹글고, 그러다보니께 팔게꺼정 됐지.”
“참 좋은 세상 일러라구. 해보니께 돼덩구먼. 내가 이런 거 팔게될 중 누가 알었겄어? 오십평생 농사만 알구 살었구먼서두.”
그러면서 어르신은 해도 해도 할 게 없고 할 수도 없었던 때의 이야기를 얼핏 하신다. 나이 열셋에 해방, 열여덟에 전쟁, 두 번의 난리를 치르면서 어떻게도 해볼 수 없었던 때의 이야기다. 농사밖에 할 게 없었을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었다.
“요즘 테레비에서 도무지 사람으루 헐 수 없는 일들을 해가매 돈벌자는 사람덜 보면 딱혀. 이렇게두 살 수 있는디 말여. 아니 뭐던 허면 되는 시상 아닌가 말여.”
물론 밥벌이로 하는 일은 아니지만 어르신은 육순의 나이에 뭔가 새로 시작했고 그것이 되어왔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대견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3년전부터 군에서 주최하는 공예품경진대회에 출품해 입선까지 하게 됐다. 올해는 물레를 출품해 3등을 했다. 집에 가보면 어르신 손을 거쳐 만들어진 옛날 농기구나 생활용품들이 가득하단다. 그중 만들기 편코, 손에 들고 다니기 편한 것이 지게였다.
“노력허면 뭐던지 되어. 이렇게 다니니께 건강에두 좋구, 애덜헌티 손 안벌리구두 손주눔덜 용돈두 줄 수 있구말여. 좀 좋어.”
‘이제 갈 디는 한군데밖에 없는 나이’라고 하면서도 어르신의 표정에는 희망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웃음이 가득했다.
김태숙 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