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당진은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마을의 모습 또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지역주민들의 기억으로만 남아 있을 마을의 이야기를 신문 지면과 유튜브 영상을 통해 기록한다.
※ 이 기사는 2024년도 충청남도 지역미디어지원사업으로 취재·보도합니다. 기사 내용은 유튜브 채널 ‘당진방송’을 통해 영상으로도 보실 수 있습니다.


따사롭게 내리쬐는 가을볕에 알곡들이 노랗게 익어간다. 추수철이 다가오면서 노랗게 황금들판을 이룬 합덕읍 신리에서는 콤바인으로 벼를 수확하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합덕읍 신리(이장 임승철)는 야산이 거의 없는 저 평지다. 현재는 평야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밀물 때 배가 드나들던 곳이었다. 이곳은 퇴적 간석지를 간척해 만든 대평야 지대로, 디지털당진문화대전에 따르면 간석지를 개답해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해서 개말, 신리(新里)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합덕읍지에 따르면 신리에는 원신리, 서뜸, 동뜸, 윗뜸, 신촌, 말바탱이, 도촌, 신포장, 하개, 강개의 11개 자연마을이 있다.
염규백(67) 씨는 “신리에는 (현재 기준으로는) 7개 반으로 구성돼 있다”며 “합덕읍의 34개 리 중에서 경지 면적으로는 신리가 두 번째로 넓다”고 덧붙였다.
충청남도 쌀농사연구회장을 역임한 이진규 씨는 대대로 합덕읍 신리에서 살아온 신리 토박이다. 그는 과거 신리의 모습을 전했다.
“구양도 다리가 생기기 전에 예산과 이쪽을 통과하려면 강개나루를 건너야 했어요. 행정상으로는 신리인데, 대합덕리 삼호마을과 가깝고 옛날 삽교천 바닷물이 들어오던 뱃터를 ‘시거리 강개’라고 불렀어요. 그 나루를 건너려면 보리 몇 말, 벼 몇 말을 가져와야 했죠. 언제는 이런 일이 있었어요. 뻘이 있으니까 옷을 벗고 건너야 하는데 양반은 그렇게 못하니까 거루쟁이(나루쟁이)가 업고서 건너 줘야 해요. 양반이 거루쟁이한테 말할 때 반말을 쓴 거죠. 이에 거루쟁이도 양반한테 반말을 쓰니까 양반이 ‘이놈의 자식이 어른도 몰라보고 반말 쓴다’며 뭐라고 하니까 거루쟁이가 ‘어어’ 하면서 (일부러) 뻘에 자빠졌어요. 그래서 이후에는 거루쟁이도, 양반도 꼭 존댓말을 쓴다고 해요.” (이진규 씨)
귀신이 방해한 운동회의 미스터리
신리에는 마을의 부호였던 박병렬 선생이 건립한 신촌초등학교(개교 1937년)가 있다. 이진규 씨는 신촌초등학교에 얽힌 기억을 꺼내었다. 그는 “마을 가까이에 학교가 있어서 주민들이 덕을 많이 봤다”면서 주민들은 박병렬 선생의 공적을 기리며 신촌초등학교에 동상을 세운 일을 전했다. 그러나 현재 동상이 있던 곳에는 동상 좌대와 비문만 남아 있다. 이진규 씨는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전쟁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그 동상을 징발해갔다”면서 “그런데 풍문에 따르면 일본이 못 가져가고 해방 되면서 당진 어느 창고에서 없어졌다고 한다”고 덧붙였다.
또한 이진규 씨는 학교 자리를 비롯한 그 일대가 본래 ‘모이퍼’(공동묘지)였다고 전한다. 그는 “남쪽으로 가면 소리벌이라는 곳의 끄트머리에 나무들이 있었는데, 덕태장이라고 해서 사람이 죽으면 나무 의자에 꿰어 매달아 1년간 두고 수기가 빠지면 이후 묘를 썼다”면서 “멀리가지 못 하니까 그곳이 우리 어렸을 때 묫자리였다”고 설명했다. 이어 “신촌초등학교를 짓고 운동회나 학예회를 열면 꼭 날이 궂었다”면서 “어른들 말씀에 의하면 묵은 귀신들이 방해해서 그런 날씨가 온다고 하더군요”라고 덧붙였다.
“천주교 박해로 구들장 떼어버리고”
신리는 우리나라 천주교의 뿌리가 내려진 곳이다. 신리는 천주교 탄압기의 가장 중요한 교우촌으로 인식됐다. 조선에서 가장 큰 교우 마을이었으며, 선교사들의 비밀 입국처이기도 했다. 신리에 정착해 살던 밀양 손씨 집안을 중심으로 천주교 교우촌이 형성됐는데, 인구 400여 명인 신리마을 전체가 신자였다고 전해진다.
특히 신리에는 1845년 제5대 조선교구장 다블뤼 주교가 김대건 신부와 함께 입국한 후 1866년 갈매못에서 순교하기 전까지 21년의 시간을 보낸 곳이다. 한국의 천주교 전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이곳은 조선의 카타콤바(로마시대 비밀교회)로 불리기도 한다.
또한 신리성지 성당의 사옥회장을 맡고 있는 유철호(79) 씨는 신리성지가 역사적으로 박해를 많이 받았던 지역임을 상기시키며, “1866년 병인박해 때 손자선(토마스) 성인이 공주에서 순교했고, 그의 집에서 머물던 다블뤼 주교는 오메트르·위앵 신부, 황석두(루카)와 함께 1866년에 순교했다”고 설명했다. 이진규 씨는 “다블뤼 주교가 살던 집 구조를 보면 박해가 심했던 것을 알 수 있다”고 전했다. 그는 “난방을 하면 셋째 방까지 열 전달이 잘 되지 않아서, 과거에는 보통 방 3개 구조로 잘 짓지 않았다”면서 “그런데 다블뤼 주교가 살던 집에는 숨을 공간을 마련하고자 방을 3개하고, 구들장을 떼어 없앴다”라고 덧붙였다.
이를 기반으로 한국 천주교의 대표적인 성지중 하나인 ‘신리성지’가 있다. 당시, 천주교가 조선 구석구석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큰 역할을 했던 신부와 신자들이 순교한 유적지다. 다블뤼 주교의 은거처, 성인들의 경당, 순교자기념관과 순교미술관 등 아름답고도 성스러운 공간이 신리성지와 그 주변에 자리하고 있다.
유철호 씨는 “전국에서 많은 신자들이 신리성지를 찾아오는데 주말이면 비신자들도 많이 온다”며 “신리성지에 있는 치타누오바 카페는 들판의 정경이 어우러져 입소문이 났으며, 국내 유일의 순교미술관이 있어서 지금까지도 많은 신자들이 찾아온다”고 전했다. 이어 “우리나라 성지 중에서도 신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성지라 자랑스럽고 영광스럽게 생각한다”며 “저도 긍지를 가지고 살고 있다”고 강조했다.

“마을 화합과 주민들의 행복 염원”
염규백 씨는 “이웃 간 불협화음이 없이, 평화스럽게 사는 곳이 신리 부락”이라며 “늘 한 가족같이 잘 지내서, 합덕읍에서도 타의 모범이 되는 마을”이라고 자부심을 드러냈다. 이종길 노인회장은 지역 사회의 화합과 주민들의 행복한 삶을 기원하는 마음을 전했다. 이종길 노인회장은 “우리 동네가 잘 되니까 앞으로도 그렇게 나갈 것이니 걱정 없다”면서 “항상 단합이 잘 되고, 주민들이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