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호지면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사 중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없는 유례없는 방식의 항거, 4·4독립만세운동의 역사를 지닌 곳이다.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증언을 통해 그들의 삶을 조명하는 한편, 4·4독립만세운동의 숨겨져 있던 역사의 사실 또한 발굴, 기록하고자 한다. 총 6명의 남겨진 이들을 만나 볼 예정이며, 지면 보도와 함께 다큐멘터리 영상으로도 기록될 예정이다.

※ 이 기사는 2024년도 충청남도 지역미디어지원사업으로 취재·보도합니다. 기사 내용은 유튜브 채널 ‘당진방송’을 통해 영상으로도 보실 수 있습니다.

(사진 : 이미화)
(사진 : 이미화)
故 남영렬 애국지사
故 남영렬 애국지사

故 남영렬 애국지사는 1919년 4월 4일 대호지면에서 발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경찰에 체포됐다. 20여 일 후 공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고 태형 90대를 받아야만 했다. 징역을 살 것인지, 혹은 참나무 몽둥이로 태형을 맞을 것인지 물었을 때 남 애국지사를 비롯한 당시 함께 체포됐던 이들은 태형을 선택했다.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받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거둬야 할 식솔 생각에 징역 대신 태형을 선택했다. 고문을 받은 이들의 남은 아픈 삶과 그 곁에 있는 가족의 삶은 이후 어땠을까.

구장을 맡아 주민 이해 이끌었던 애국지사

故 남영렬 애국지사는 지금의 이장 격인, 당시 마을 일을 돌보는 ‘구장’을 맡았다고 한다. 구장을 하면서 집안일뿐 아니라 동네 모든 사사로운 일까지도 관심을 기울였다. 만세운동이 일어난 그 시기는 먹고 살기 어려운 때였다. 더구나 먹을 것이 부족했던 봄이었다. 누구도 나서기 힘들었을 때 당시 대호지 사람들은 주권을 찾기 위해 들고 일어났다. 손자 남우용 씨는 “당시 의식을 해결하기 힘든 때였는데도 할아버지는 많은 분을 이해시키고, 설득해 서슬이 시퍼런 일본 사람들 앞에서 독립 운동으로 주권을 찾겠다고 나섰다”며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싶어 의문스러우면서도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밤마다 주민을 찾아다니면서 설득한 거죠. 그리고 할아버지가 당시에 동네 사람들에게 한학을 가르치셨다고 해요. 가르침 중에서 한민족과 관련한 공부를 주민들에게 많이 시키지 않았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손자 남우용 씨)

민족 의식 고취한 도호의숙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대호지면 도이리에는 ‘도호의숙’이라는 사립 교육 기관이 존재했다. 도호의숙은 한학 외에도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는 교육으로 다수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곳이다. 도호의숙에서 공부한 남상락, 남계창, 남주원, 남상돈은 고종 황제 인산일에 파고다 공원 3·1만세 운동에 참여한 후 고향인 당진으로 내려와 천의 장터에서 4·4만세 운동을 주도했다.

주권을 잃던 그 시대에도 도호의숙에서는 독립 정신을 잃지 않도록 많은 사람들이 학문을 이어갔다.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는 교육을 이어가며 일본에게 빼앗긴 우리나라를 되찾아 오기 위한 투지의 촛불이 꺼지지 않던 곳이 이곳이었다.

한편, 4월 4일 도로 공사를 목적으로 12개 마을 주민들을 다 동원했고, 마을에 있는 구장을 주축으로 약 600여 명이 대호지 면사무소로 집결했고, 그때 대호지에 만세운동의 물결이 일었다. 만세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태형을 맞은 故 남영렬 애국지사는 이후 대호지로 돌아와 이곳에서 조용히 지내다 1971년에 세상을 떠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故 남영렬 애국지사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고, 그의 유해는 2011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됐다.

“아버지·시아버지 생각하면 뭉클”

한편, 쉰 줄에 가진 아이라 하여 불린 ‘쉰둥이’ 딸 남오순 씨는 아버지를 떠올리자 눈물을 흘렸다. 한 번 흐른 눈물은 아버지의 이야기가 끝나는 동안 내내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 나이 51세 즈음 남오순 씨가 태어났다. 기미년 독립만세운동할 때 형편이 어려워 쑥 뿌리를 캐 먹었단 이야기, 아버지를 잡으러 온 사람들을 피해 골망 밭으로 피한 아버지에게 담뱃대를 가져다 주던 때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

천자문을 가르쳐 준 아버지 덕에 한자가 있는 신문을 읽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유독 그를 귀여워했다. 아버지가 약주하고 오신 날에는 그를 무릎 위에 앉혀 맛있는 것을 입에 넣어주며 머리를 쓰담아주기도 했다.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랐던 나이였다. 그는 “아버지는 비만 오면 맨날 아프다, 삭신이 쑤신다고 하셨다”며 “그때는 주물러 드리기 귀찮은 마음에 꾀를 내기도 했었다”고 말했다. 이어 “매 맞은 후유증인 것도 몰라 꾀부린 것을 생각하면 참 미안하다”고 말했다.

며느리 조용희 씨에게 故 남영렬 애국지사는 다정한 시아버지였다. 그는 “인자하고, 멋있고, 선비였다”며 “말 한 마디 헛으로 하지 않고 늘 좋은 말만 했던 아버님이었기에, 아버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진다”고 말했다.

태형을 맞고 돌아 온 시아버지는 늘 몸이 아팠다. 아픈 시아버지를 위해 시어머니와 산에 가서 진달래 뿌리를 캐 고아 드린 것이 또렷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는 “결혼했을 때 아버님 나이가 61세였는데, 그때도 많이 아프셨다”며 “겨울이면 동네 약국에서 약을 지어 데워 드리기도 했다”고 말했다.

“할아버지가 남긴 무형의 자산”

어려웠던 시기에는 독립운동한 것이 쉬이 드러내지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인정을 받고, 후대에 남겨지면서 그 자손들이 기억하고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손자 남우용 씨는 “할아버지, 아버님이 무형의 자산을 많이 물려준 것이 큰 자산이라고 생각한다”며 “나만 생각하지 않고 항상 가족, 이웃을 생각하며 살아오신 분들”이라고 말했다. 이어 “나 혼자 욕심 부리며 살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자신있게 말할 수 있고, 그렇게 행동하게 된 동기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가르침 덕”이라며 “무형의 자산이 살아가는 데 큰 인생의 지표가 됐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어려운 시기에 나라의 주권을 찾고자 거사를 치른 사건이 좁은 당진에서만 매년 재현되는 것이 아쉬워요. 이 일이 교육 자료로 남아 학생들에게 많이 알려졌으면 해요. 젊은이들이 역사 인식을 정확히 가졌으면 합니다.” (손자 남우용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