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대호지면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사 중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없는 유례없는 방식의 항거, 4·4독립만세운동의 역사를 지닌 곳이다.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증언을 통해 그들의 삶을 조명하는 한편, 4·4독립만세운동의 숨겨져 있던 역사의 사실 또한 발굴, 기록하고자 한다. 총 6명의 남겨진 이들을 만나 볼 예정이며, 지면 보도와 함께 다큐멘터리 영상으로도 기록될 예정이다.

※ 이 기사는 2024년도 충청남도 지역미디어지원사업으로 취재·보도합니다. 기사 내용은 유튜브 채널 ‘당진방송’을 통해 영상으로도 보실 수 있습니다.

대호지·천의장터 4·4독립만세운동은 전국 최초의 민관 합동 항일운동이자, 당진 최대의 독립만세운동이었다. 면장이 지휘했으며, 여기에 면서기가 추진 세력으로 독립만세를 준비했다. 그리고 지역 유생과 문중 가문을 비롯해 대호지면 내 모든 마을 주민들이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부르짖었다. 만세운동으로 인해 200여 명이 넘게 경찰서로 끌려갔으며, 결국 3명이 순국하고 88명이 태형을 받는 등 199명이 일제의 잔혹한 탄압을 받았다. 핏빛 희생의 끝은 정말로 ‘대한 독립’이었고, 이것이 우리가 이들을 잊지 말아야 할 이유다.

본적 바꾸며 일찍이 독립운동 준비

손녀 송정임·송태연 씨의 할아버지, 故 송재만 애국지사는 대호지·천의장터 4.4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세 사람 중 한 명이다. 이인정 선생은 대호지면장으로, 만세운동 준비를 전반적으로 지휘했다. 그리고 송재만 선생은 그 아래서 행동에 나섰고, 도호의숙에서 학생을 가르치던 한운석 선생은 만세 계획과 애국가를 작사했다.

송재만 열사는 18살 무렵 대호지면사무소에 들어가 일을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0년이 지나 28살 나이에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두 손녀는 할아버지가 일찍이 우리의 독립을 바라고 준비했을 것이라고 봤다. 독립 만세 운동을 하기 아주 훨씬 전, 서산에서 태어난 송재만 열사는 천안군으로 잠시 이적하면서 이때 본관을 ‘은진(恩津)’으로 바꿨다. 두 손녀는 “다른 송 씨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아무도 모르게 호적정리를 했다”며 “그래서 우리도 한참을 ‘은진 송씨’로 살았었다”고 말했다.

故 송재만 애국지사
故 송재만 애국지사

“지팡이에 독립선언서 몰래 숨겨 와”

잠시 인천에서 살다 온 송재만 열사는 대호지 사람 중 유일하게 자전거를 탈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덕분에 갈 수 있는 곳이 많았고, 많은 부분을 해낼 수 있었다. 태극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광목이 필요했다. 이때 송재만 열사는 광목 장사인 척하며 일본 순사의 눈을 속이며, 서산 시내에서 광목을 가져 와 밤마다 태극기를 만들었다.

또한 삼엄한 일본 순사들의 경비 속에서, 송 열사는 천안에서 독립선언서를 가져오는 데 성공한다. 독립선언서를 구겨지지 않도록 돌돌 말아 지팡이(단장) 속에 숨겨 독립선언서를 이 땅으로 가져올 수 있었고, 그 덕에 독립선언이 ‘그날’에 울릴 수 있었다.

또한 당시 면에서 일했던 송재만 열사는 집집마다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전했다. 송재만 열사는 ‘그날’을 알리고, 일본 순사들이 부역으로 오인하게끔 곡괭이나 호미 등을 가지고 나오라는 말을 전했다.

“ 모두 내 잘못이오”

4월 4일, 모두의 염원이 대호지를 넘어 정미면 천의장터까지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 이후 모진 핍박은 피할 수 없었다. 송재만 열사는 체포돼 보안법, 출판법 위반과 소요, 공문서 위조 행사, 강도, 상해, 가택 침입이라는

7개 죄목을 받았다. 그리고 징역 5년 형을 확정 받았으며, 서대문감옥에 수감돼 옥고를 치렀다. 옥고를 치를 당시, 송 열사는 “모두 내 잘못”이라고 나서, 형이 더 길어지기도 했다.

보통 기록에는 ‘옥고를 치렀다’는 내용으로 끝이 난다. 하지만 이후의 삶은 만세운동 그때보다 더 길었고, 더 힘들었다. 가족들에 의하면, 출소한 송재만 열사는 대호지에 돌아와서 일본 순사들의 감시 속에 살아야만 했다. 일본 순사가 바로 옆에 거주하는 옴팡집 하나 내어주고, 이곳에서 그를 살도록 했다. 두 손녀는 “할아버지를 거의 묶어두다시피 사찰을 했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결혼도 늦었다. 늦은 결혼 후 세 아이를 가졌지만, 가난 때문인지 오래 살지 못하고 연이어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딸 한 명과 7살 터울을 둔 아들을 송 열사의 나이 41세에 늦게 얻었다고 한다.

故 송재만 애국지사의 손녀 송정임 씨
故 송재만 애국지사의 손녀 송정임 씨
故 송재만 애국지사의 손녀 송태연 씨
故 송재만 애국지사의 손녀 송태연 씨

“인두로 지진 상처, 바닷물로 삭혀”

막내 손녀인 송태연 씨는 “어려서부터 대호지 분들에게 할아버지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며 “옥고를 치를 때 할아버지 등에 이름을 인두로 새기는 고난을 당했다”고 말했다. 이어 “인두로 지진 등이 간지럽고 아파서 할아버지가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바다에 가서 해수욕을 했다”며 “옛날에는 약도 없으니, 짠기가 있는 바닷물이 상처에 닿으면서 따끔거리는 걸로 아픔을 달랬던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다리를 맞고 생살을 잘라낸 고문의 여파로 인해 송재만 열사는 아무리 날이 더워도 바지를 사람들 앞에서 걷지 못했다고 전했다.

“우리나라는 좋은 나라다”

독립 이후 조금은 생활이 나아질까 싶었지만 6.25전쟁이 곧 발발했다. 그리고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두 세력이 맞붙었다. 당시 민주주의를 외쳤던 송재만 열사는 공산주의가 세력을 잡으면서 바로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가 됐다. 손녀 송태연 씨는 “또 할아버지가 공산주의 세력으로부터 끌려 갔다”며 “그때 하루 허락을 받아 면회를 나와 대나무밭에 땅굴을 만들고 있었으나 잡혀갔다”고 말했다. 이어 “다시 잡혀간 할아버지는 3개월 동안 옥에 갇혔다가, 또 하루 면회를 받아 왔고 그때 다시 잡히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바다로 도망갔다”며 “바다로 도망가던 중 군함이 대호지 바다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할아버지를 잡으러 온 사람들이 도망가 겨우 살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아버님(송재만 열사)은 어디를 가도 이 세 마디를 전하셨어요. 우리나라는 좋은 나라다. 우리나라는 대한민국이다. 우리는 우리나라를 지켜야 할 후손이라는 말을요. 그리고 모든 일을 바르게 해야 한다고 지도하러 다니셨어요. 어떤 자리에서도 민주 연설을 빠지지 않고 다녔죠.”(송재만 열사의 며느리 박영순 씨)

“그의 죽음에 애달파 했던 주민들”

송재만 열사가 세상을 떠나고 초상을 치를 때, 여러 곳에서 노제를 치렀다고 한다. 두 손녀는 “할아버지는 베푸는 사람이었을 것”이라며 “해방 후에 사성리와 적서리에 뚝을 막아 땅을 만드는 감독 일을 했는데, 그렇게 만든 땅을 불쌍한 사람들에게 나눠줬다”고 말했다. 이어 “나중에 보니, 같은 일을 했던 분은 부족함 없이 지냈는데 우리 집은 그렇지 않았다”며 “그 외에도 할아버지는 아픈 사람이 있으면 데려가 약도 지어 주는 등 많이 베풀었다”고 말했다. 며느리인 박영순 씨에 따르면 6.25 전쟁으로 피난 당시, 사람들에게 집을 내주던 송 열사는, 다른 집들을 전전하며 살았고 결국 길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송재만 열사가 세상을 떠난 후, 많은 이들이 그의 죽음을 애달파 하며 곳곳에서 제를 지내줬다고.

손녀 송태연 씨는 “할아버지는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생각하며 살았다”며 “할아버지의 본을 받아 작은 것이라도 주변에 선함을 베풀며 살아야겠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까지는 할아버지를 내 자손에게도 잘 알리지 못하고 살았다”며 “이번 인터뷰를 기회로 할아버지를 더 알 수 있었고, 내 자손에게라도 할아버지의 업적을 이야기 하며 선함을 가지고 살 것을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덧붙여 송태연 씨는 지금의 국가유공자 예후 제도에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국가유공자과 관련한 연금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며느리인 어머니가 이어 받으실 줄 알았다”며 “하지만 며느리인 어머니는 손자인 나는 물론, 외손자와 외손녀 밑에 있더라”고 말했다. 이어 “며느리도 똑같은 유공자의 자식인데, 그 순위가 바뀌었으면 한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