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대호지면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사 중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없는 유례없는 방식의 항거, 4.4독립만세운동의 역사를 지닌 곳이다. 대호지·천의장터 4.4독립만세운동으로 1명이 참살, 3명이 옥에서 순직했다. 40명이 실형을 살았고 88명의 주민이 3일에 걸쳐 태형 각 90대를 맞았다. 그중 20여 명의 주민은 2~3년 후 생을 마감했다. 현실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남겨진 이들이 있었다.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증언을 통해 그들의 삶을 조명하는 한편, 4.4독립만세운동의 숨겨져 있던 역사의 사실 또한 발굴, 기록하고자 한다. 총 6명의 남겨진 이들을 만나 볼 예정이며, 지면 보도와 함께 다큐멘터리 영상으로도 기록될 예정이다.

※ 이 기사는 2024년도 충청남도 지역미디어지원사업으로 취재·보도합니다. 기사 내용은 유튜브 채널 ‘당진방송’을 통해 영상으로도 보실 수 있습니다.

故 고쇠능 애국지사는 그의 증손주인 고완호 씨를 늘 아꼈다. 아직도 어린 고 씨의 기억이 또렷하게 남아 있다. 가을이 무르익을 무렵에는 증조할아버지(고쇠능 애국지사)와 밤나무가 있는 뒷동산을 올랐다. 담배를 썰어 보관하던 쌈지에 밤을 넣고 달아질 때가 되면 증조할아버지는 손수 밤을 깎아 증손주 입에 넣어 주었다. 증조할아버지를 달려서 쫓아가는 시늉을 하면, 그 장단에 맞춰 주었다. 고쇠능 애국지사는 두 발가락이 없었다. 발톱 아래 대침으로 찌르는 고문을 당했고, 제때 치료하지 못해 결국 발이 썩어들어 갔다. 두 발가락이 없어 쩔뚝이면서도 증손주의 장난을 받아 뛰던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고 남아있다.

“당시 세 집 중 두 집이 경찰에 잡혀가 ”

1919년 4월 4일, 작은 동네였던 대호지면에서는 독립 만세가 동네를 흔들었다. 국가보훈처의 공훈전자사료관에 따르면, 함성이 울리기 이틀 전, 송재만, 김동운, 강태완 등은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3일 대호지면정 이인정 명의로 각 마을 이장에게 공문을 보냈다. 도로 보수를 위해 각 마을 사람들을 대호지면사무소 앞으로 모이게 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4월 4일 아침 대호지면사무소에 500여 명이 넘는 주민이 모였다.

이때 면서기 송재만 등은 면장 이인정, 남계원 등과 독립만세를 선창하고 태극기를 앞세워 천의 시장까지 행진했다. 시위 과정에서 마을 주민들이 합류해 오전 11시경 시장에 도착했을 때 약 1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짖었다. 천의장터 만세운동과 관련해 일제에 피체돼 처벌을 받은 인원이 200여 명에 이른다고 알려져 있다.

“독립만세운동에 600여 분이 참여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때 대호지에 900여 세대가 살고 있었다는데, 600여 명이면 3집 중 두 집은 경찰에 잡혀간 거라 볼 수 있죠. 너나 할 것 없이 초상집이었을 거에요.”

모진 고문에 두 발가락 잃어

고쇠능 애국지사가 국가유공자로서 서훈을 받은 것은 지난해로, 다른 애국지사들보다 한참을 늦게야 받았다.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은 맞지만, 하지 않았다고 끝까지 행동을 부인했다. 소요, 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아 옥고를 치렀으나, 결국에는 ‘증거 없음’으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고완호 씨는 “혐의를 인정하면 후세 자손에게 누가 될 거라는 생각을 증조부가 했던 것 같다”며 “여기서 죽으면 죽었지, 발설은 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은 증조부가 결국 모진 고문을 그대로 받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얼마나 모진 고문을 받은 것인지, 면회 세 번 중 마지막 면회 때 전달한 옷을 벗지도 못하고 3개월 내내 입고 있었다고 한다. 그 모습으로 집에 찾았을 때 증조부의 옷은 피와 살이 붙어 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대침으로 발톱 아래를 찔러 발가락을 잃어야 했고, 이 일로 평생을 지팡이를 짚어가며 살았다. 그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가족들도 그 아픔을 감내해야만 했다. 혹시라도 자손들에게 피해라도 될까, 입을 꾹 닫고 살았던 고쇠능 애국지사의 한이 지난 2021년에 들어서야 다소 풀렸다. 2021년 대통령 표창 추서에 이어, 늦게라도 지난해 서훈을 받을 수 있었다.

“쌍상여가 장지로 향하던 모습이 기억나”

고완호 씨에게 증조부 고쇠능 애국지사는 애틋한 존재다. 고쇠능 애국지사의 손자이자 고완호 씨의 아버지는 일본으로 징용을 가는 바람에 늦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봤다. 그때 첫 아이가 고완호 씨로, 증조부는 그를 땅에 내려 놓지 말고 키우라고 할 정도로 아꼈다고 한다. 어려운 사정에 밥도 못 먹던 시대에 고 씨를 전적으로 봐주던 보모까지 뒀을 정도였다.

그의 나이 7세 때 고쇠능 애국지사가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눈이 많이 내리던 날, 증조부가 살던 부락과 둘째, 넷째 할아버지가 살던 도이리에서 상여가 나와 쌍상여가 장지로 향하던 모습이 아직도 그의 눈에 선하게 남아 있다.

“증조 할아버지의 서훈, 제가 가장 기뻤어요”

증조부가 서훈을 받을 수 있도록 뛰어 다닌 것도 고완호 씨다. 당시 부산에 있었던 국가기록문서보관소를 찾아 자료를 확보하기도 했다고.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고 씨는 “판결 내용 위주로 서훈을 받는데, 증조부는 ‘혐의 없음’으로 끝나 가망이 없다고 생각해 포기했다”며 “서훈 작업이 늦게 시작되다 보니 증언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은 거의 돌아가신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부산과 대전을 오가면서 수형인 명부를 찾고, 한문이나 일본어로 써 있는 내용을 작은아버지에게 부탁해 전문가 판독까지 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 결과, 공소 사실이 없다는 내용이 적힌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서훈을 받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서훈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들이 많이 기뻐했죠. 그중에서도 제가 가장 기뻤어요. 당고모, 당숙, 작은아버지 등 가족들이 저에게 고생했다는 격려를 해줄 때 가장 뿌듯했습니다. 증조 할아버지는 모진 고문에도 완강하게 혐의를 부인했습니다. 몸이 상하도록요. 어떻게 사람에게 대침으로 찌를 수 있을까요. 저는 아직도 일본 사람에게 원한이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