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대호지면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사 중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없는 유례없는 방식의 항거, 4·4독립만세운동의 역사를 지닌 곳이다.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증언을 통해 그들의 삶을 조명하는 한편, 4·4독립만세운동의 숨겨져 있던 역사의 사실 또한 발굴, 기록하고자 한다. 총 6명의 남겨진 이들을 만나 볼 예정이며, 지면 보도와 함께 다큐멘터리 영상으로도 기록될 예정이다.
※ 이 기사는 2024년도 충청남도 지역미디어지원사업으로 취재·보도합니다. 기사 내용은 유튜브 채널 ‘당진방송’을 통해 영상으로도 보실 수 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할아버지(故 이달준 애국지사)가 대호지·천의장터 4.4 독립만세운동에서도 주도를 했다고 해요. 거기서 일본 사람들에게 체포돼 공주 형무소로 끌려갔죠. 큰아버지와 아버지가 공주 형무소에 가서 만나려고 해도 보지도 못하게 했어요. 그러다 할머니가 언제 연락을 받고 그렇게 울더래요. 무진 우셔서 물어보니, 할아버지가 죽어서 그 시체를 공주의 무슨 댐에 버렸다고 하더라고요. 큰아버지와 아버지가 둘이 며칠 걷고 걸어가 시체를 찾으려고 하니, 시체가 어디있겠어요. 일본 사람들이 어디다 갖다 버렸는지도 모르고. 결국은 못찾았죠.”
1881년에 태어나 우리의 주권을 찾기 위해 독립운동이 한창이던 1919년, 故 이달준 애국지사의 생이 마감됐다. 아픈 역사의 시대 속에, 옥고까지 치를 정도로 격정적인 항쟁을 벌인 故 이달준 애국지사. 그는 끝까지 항쟁했고, 결국 옥 안에서 목숨을 잃어야만 했다. 당시 만세운동으로 김도일, 박경옥 그리고 이달준 애국지사가 옥중 순국했다. 애국지사의 숭고한 정신과 그의 희생 후 남겨진 가족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만세운동에 앞장서”
1919년, 당진지역에서 최대 규모로 벌어진 4.4독립만세운동. 이 선두에 故 이달준 애국지사가 서 있었다. 4월 4일의 만세운동이 벌어진 후 바로 대호지면 송전리에서 8일, 또 한번의 만세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송전리 뒷산에서 독립을 염원하는 횃불이 밝혀졌고, 이때 일본 군경과 독립운동을 하던 주민들의 마찰로 사상자까지 발생한다. 그리고 같은 날, 늦은 밤에도 처절한 독립을 부르짖은 울음은 끊이지 않는다. 정미면 수당리에 있는 봉화산의 봉화대에서 규모있는 봉화 시위가 벌어지게 된다. 이곳에서도 일제의 총격으로 인해 한 명이 사망하게 된다.
나라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일념이 모이며, 결국 우리는 나라를 찾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그 뒤에는 그들의 희생이 따랐다. 故 이달준 애국지사는 당시 주도적으로 만세운동을 이끌어 가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김남석 전 호서고 역사교사는 “당시 만세운동에 가담한 분들 대부분이 서산경찰서에서 태형을 맞고 석방됐으나, 이달준 애국지사는 공주 검사국까지 끌려갔다”며 “상당히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되고, 이후 공주 감옥에서도 대단한 항쟁을 벌였다”고 말했다.

“애타게 찾은 금강하구”
옥에서 고문받던 故 이달준 애국지사는, 모진 형벌을 맞다 결국 옥중에서 목숨을 잃었다. 김 교사는 “당시 이달준 애국지사를 포함해 김도일, 박경옥 애국지사가 옥사했다”며 “평범한 항쟁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이어 “그곳에서도 치열하게 싸웠고, 일제의 억압에 굴복하지 않은 채 항쟁을 했기에 결국 옥사라는 안타까운 결과를 맞이했다”고 말했다.
옥중에 순국한 그의 시신을 찾기 위해 가족들은 애타게 금강 하구를 뒤졌다. 하지만 결국 시체는 찾지 못했고, 가족들은 故 이달준 애국지사가 집에서 나간 음력 날마다 제사를 지내고 있다.
“꼬박 걸어 학교 가고 먹은 보리 한덩이”
이달준 애국지사는 슬하 2남 3녀, 5남매의 자식을 뒀다. 체포된 이후 남은 가족들의 생활도 녹록지 않았다. 이달준 애국지사의 아내이자 이창영 씨의 할머니는 남의 집에서 일하며 받은 적은 쌀로 가족들을 키웠다. 궁핍한 생활로 인해서였을까. 남은 가족들도 일찍이 생을 마감했고, 자손인 이창영 씨 역시 먹고 살기 어려운 생활에서 자라야 했다. 그는 “여기서 대호지면 조금리에 있는 학교까지 5km가 넘는다”며 “하루종일 걸어서 학교 한번 갔다 오고 집에서 먹을 수 있는 밤은 보리 한 덩이였다”고 말했다. 덧붙여 “작은 집, 작은 방 한 칸에 우리 일곱 남매가 다 같이 자고 생활했다”며 “그때는 먹을 것조차 없었다”고 말했다.
“먹고 사는 것도 힘들었지만, 왜 그런지도 몰랐죠. 그때는 할아버지 이야기를 할머니가 잘 해주지 않았어요. 혹시라도 자손들에게 해가 갈까 아예 얘기를 안 했죠. 저희 말고 할머니와 아버지 세대는 눈물 날 일이 많았을 거예요. 지금 할아버지에 대한 사진도 제대로 없고, 자료도 다 사라졌어요. 그 부분이 무척 아쉽습니다.”
“후손에 대한 지원 필요해”
한편, 대한민국 정부는 故 이달준 애국지사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 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위패가 1992년에 건립된 창의사 추모각에 모셔졌다. 후손들의 남은 바람은, 국립현충원의 故 이달준 애국지사의 위패가 모셔지는 것이다. 이창영 씨는 “1년에 한두번씩 국립현충원을 들리는데, 위패가 모셔져 있지 않아 밖에서 참배만 하고 올 뿐”이라며 “옥중에 돌아가실 정도로 투쟁한 할아버지의 위패가 모셔졌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나라를 찾고자 독립운동한 이들의 가족이 어렵게 살았습니다. 저희도 할아버지의 훈장을 받고 나서 2년 정도 연금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수급권자인 사촌 형님이 돌아가시니 그냥 끊기더라고요. 2년도 채 못받았죠. 후손들에 대한 지원도 이뤄지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