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진에 자리한 작가의 작업은 하얀 여백 위에 매일 새롭게 펼쳐지는 그림 한 장과 같다. 한지민(48) 작가는 서울에서의 바쁜 생활을 뒤로 하고 당진으로 내려와, 바다와 포구가 가진 시간과 공간의 이야기를 작품에 담고 있다. 유화, 삽화, 목판화, 드라마 벽화, 그리고 최근 출간된 그림책까지. 한 작가는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뒷모습이나 옆모습 신체의 일부, 혹은 특정한 오브제를 통해 자신만의 세계를 그려가고 있다. 면천면의 책방 ‘오래된 미래’를 배경으로 한 그림책 <책의 자리> 출간을 통해 그림책 작가로서 오는 16일 독자와의 만남을 앞두고 있다.

바다와 책방, 창작의 거점이 된 당진
한지민 작가는 당진의 포구와 자연이 작업의 원천이자 쉼표라고 말한다. 작업실 밖을 나서면 만나는 사람들, 포구에서 마주한 장면들 모두가 그의 창작 재료가 된다.
한 작가는 “각박한 서울 생활에 지쳐갈 무렵, 동생이 결혼해 내려와 있어서 우연히 당진에 머물게 됐다”라며 “유독 이주민이 많고 여러 개의 포구로 둘러싸인 당진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이의 거리감을 이야기 하는 내 작업과 닮아 있는 도시”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바다와 만나는 장면, 사람들과 스치는 순간들이 자연스레 작품 속에 녹아 들었다”고 덧붙였다.

벽화에 담긴 뒷모습, 그리고 정우성
지난해 그는 정우성 주연의 드라마 <사랑한다고 말해줘>(ENA, 2023.11.27. ~ 2024.01.16. 방영)의 극중 주인공인 차진우가 그린 벽화 작업에 참여하며 대중과의 접점을 넓혔다. 드라마 연출을 맡은 김윤진 감독은 ‘드라마 속 주인공 진우가 사람을 그린다면 어떻게 그릴까?’ 생각하던 중 표정을 알 수 없는 사람의 뒷모습을 그린 작품을 보고 제작팀을 통해 연락해 왔다고.
제주도가 배경인 드라마의 벽화작업을 위해 한 작가는 한 달을 제주에 머물렀다. 그는 “한경면의 해안 마을에서 한 달간 그림을 그렸는데 ‘벽화 작업을 위해 해안도로를 달리며 이렇게 아름다운 출근길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그는 “촬영 현장에서 배우 정우성이 자신의 그림 앞에 앉아 붓질하며 연기를 펼치는 모습을 보다 울컥했던 순간은 잊혀지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김애란 소설의 표지, 거짓말의 교차점
책표지로서 이름을 알린 한지민 작가는 평소 호감을 가지고 있던 김애란 작가의 장편소설 <이중 하나는 거짓말>의 표지 작업도 참여했다. 이 소설은 “서로 만나지 않고도 이루어지는 애틋한 접촉은 그림과 비밀, 그리고 슬픔으로 밀착되는 세 아이의 이야기”라며 “편집부에서 한 작가의 그림이 절묘하게 포개지며 소설 속 세 아이의 이미지와 맞닿는다고 표지 이미지 사용을 제안받았다”라고 말했다. 이어 “표지 그림을 보고 울컥했다는 독자의 말에 감동을 받았다”며 “그림을 통해 책과 독자들이 연결된다는 것이 너무나 소중한 경험이었다”고 밝혔다.

오래된 책방, 그림책으로 피어나다
최근 출간된 그림책 <책의 자리>는 면천면의 책방 ‘오래된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한 작가는 “6년 전쯤 책방이 생기기 전부터 그 공간에 관심이 많아 빈 건물을 유리창 너머로 보곤 했었다”며 “책방이 들어서고 손님으로 드나들었는데, 창밖으로 새어 나오는 노란 불빛이 동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책방에 애정이 생기면서 ‘오래된 미래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 책방에 놓이면 어떨까’하는 마음이 그림책 작업으로 이어지게 됐다”고 전했다.
고요하면서 따뜻함이 묻어나는 목판화
한 작가는 <책의 자리>를 통해 처음으로 수성목판화 작업에 도전했다. 수성목판화는 자작나무 판 위에 그림을 그리고, 수채물감으로 채색한 후 한지에 찍어내는 기법이다.
한 작가는 “책방의 오래된 이야기를 표현하기에는 유화보다는 목판화가 가진 아련한 느낌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돼 판화 작업을 하면서 1년 동안 책방의 사계절을 관찰했다”며 “목판화는 수정이 불가능해서 처음에는 낯설고 어려웠지만, 나뭇결까지 함께 찍혀 세월의 흔적을 담은 아련함까지 표현해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특히 눈 덮인 책방을 묘사한 장면에 깊은 애정을 드러냈다. 그는 “적요롭지만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작업했다”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상황, 지난날의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 같은 보편적인 감정을 담으려 했다”라고 덧붙였다.

애착이 가는 작품, 앞으로의 계획
그의 대표작 <흰(2020)>은 소설가 한강의 작품에서 받은 영감을 유화로 표현한 것으로, 스스로도 가장 만족스러운 작품으로 꼽는다. <흰>은 그의 첫 그림 에세이집 <혼잣말>의 표지로 쓰이기도 했다. 앞으로도 그는 ‘책과 읽는 사람들’이라는 주제를 탐구하며 서울과 런던에서의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다. 또한, 하반기에는 아미미술관에서 ‘나는 왜 이런 장면에 주목하는가’를 주제로 기획전을 통해 자신의 예술적 세계를 다시 한번 풀어낼 예정이다.
“그림 작업은 ‘혼자 걷는 길’이라 생각해요. 그림을 그리는 시간은 오롯이 제가 홀로 걸어가는 길이자, 내면을 들여다보는 순간이죠. 주로 작업하지 않을 때는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으며 떠오른 심상을 스냅사진으로 담아요. 이를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며 이야기를 해나가요. 주로 작품에서는 뒷모습이나 신체 일부로 표현되는데, 이때 ‘보이지 않는 감정’을 담아내려고 해요. 미세한 신체의 떨림이나 구도에 따라 관람자들이 인물의 내면을 상상하며 각자의 경험과 감정으로 해석하길 바라고 있어요. 보이지 않는 감정을 표현하는 과정은 즐거운 도전이며, 그림 속 모호함이 공감과 궁금증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행복할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