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고 공동체의 화합을상징하는 기지시줄다리기는 500년의 전통을 지닌 의식이다. 줄을 만들고 다리는 모든과정은 한두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며,수많은 사람의 손길이 모여야 가능하다. 오랜 세월 이어져 온 줄다리기에는 그런 이들의 노력이 담겨 있다. 총 6개의 이야기로 기지시줄다리기를 지켜온 사람들의 목소리를 전하며, 지면 보도와 영상으로 함께 기록될 예정이다.

※ 이 기사는 2025년도 충청남도 지역미디어지원사업으로 취재·보도합니다. 기사 내용은 유튜브 채널 ‘당진방송’을 통해 영상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구자동의 초등학교 3학년 당시 받은 상장. 그는 학창시절 개근상을 빼놓지 않고 받은 것은 물론 학업상, 근면성실상 등을 다수 수상했다.
구자동의 초등학교 3학년 당시 받은 상장. 그는 학창시절 개근상을 빼놓지 않고 받은 것은 물론 학업상, 근면성실상 등을 다수 수상했다.

구자동 보유자의 어린 시절

구자동 보유자는 1943년 송악읍 가교리에서 태어나 1958년 기지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어린 시절 6·25 전쟁과 보릿고개로 어려운 시기를 겪었으며, 전쟁 탓에 초등학교입학이 늦어졌다. 홍수로 둑이 무너질 때면동생과 친구들을 학교에 데려다주는 등 책임감이 컸다. 9년 개근을 기록할 만큼 성실했던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일기 쓰기를 습관처럼 이어오며 매사에 성실한 태도를 보였다.

구자동 보유자는 어릴 적부터 줄다리기를접해왔다. 당시 줄다리기는 10년에 4번들어오는 윤년에만 열리는 특별한 행사였고, 그는 줄다리기 날이 돌아오기를 손꼽아기다렸다. 마을 전체가 들썩이는 큰 행사였기에, 어린 그에게는 그 모습이 깊은 인상으로 남았다. 그는 “그때부터 줄다리기를 보고 자라며 점차 심취하게 됐고, 결국 지금까지 오게 된 것 같다”고 회고했다.

장조카 구본행의 대학 졸업식에 참석한 구자동(맨오른쪽)과 가족들. 집안에서 두 사람이나 고등학교를 보내기 어려웠던 시절. 구자동의 큰형님(자흥, 왼쪽에서 두 번째)은 그를 고등학교에 보내 공부를 시키고자 했지만, 구자동은 장조카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대동약방에 취업했다.
장조카 구본행의 대학 졸업식에 참석한 구자동(맨오른쪽)과 가족들. 집안에서 두 사람이나 고등학교를 보내기 어려웠던 시절. 구자동의 큰형님(자흥, 왼쪽에서 두 번째)은 그를 고등학교에 보내 공부를 시키고자 했지만, 구자동은 장조카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대동약방에 취업했다.

故이우영 선생과의 만남

5남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난 구자동 보유자는 중학교를 졸업한 뒤,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일자리를 찾았다. 바로 그때, 故 이우영 선생이 그를 찾아왔다. 이우영 선생은 당진에서 대동약방을 운영하던 한약사로, 1970년대 명맥이 끊길 위기에 처한 기지시줄다리기를 전승하고 보존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대동약방 근무 당시의 구자동 보유자
대동약방 근무 당시의 구자동 보유자

구자동 보유자는 이우영 선생의 제안으로 약방에서 양약과 한약을 함께 배우며 일을 시작했고, 이 만남은 그가 평생 기지시줄다리기를 지키는 삶을 살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한때는 서울의 제약회사에서 스카우트제안을 받아 상경을 고민했으나, 이우영 선생은 그를 놓지 않았다. 이우영 선생은 “내가 밥을 먹게 되면 너도 밥을 먹게 해주고,내가 죽을 먹게 되면 너도 죽은 먹게 해줄테니 어려워도 같이 가자”라고 말하며 구자동 보유자를 붙잡았다.

그렇게 구자동 보유자는 이우영 선생이생을 마감하는 그 순간까지 40여 년간 곁을지켰다.

故이우영 선생
故이우영 선생

초대 보유자 이우영 선생과 기지시줄다리기

1972년, 지역의 신임을 받던 이우영 선생은 주민들의 권유로 통일주체대의원회(대통령선출기구)에 출마해 초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당선됐다.

당시 기지시줄다리기는 명맥만 겨우 이어져 오던 전통이었는데, 1973년 대제를 전후해 지역민들 사이에서 존폐 논란이 일었다. 결국 충청남도 문화재 지정 여부로 존폐를 결정하기로 했다.

이때 이우영 선생이 문화재 지정 추진을주도했고, 구자동 보유자는 지역 원로들의구술 채록과 행정 업무를 맡아 역사 고증에힘썼다. 당시 관련 자료가 거의 없어 어르신들을 찾아가 꼼꼼히 기록했다. 그 결과 1973년 기지시줄다리기는 충청남도 민속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됐다.

국풍81 당시 줄다리기의 모습. (출처 : 서울사진아카이브)
국풍81 당시 줄다리기의 모습. (출처 : 서울사진아카이브)
국풍81 당시 줄다리기의 모습. (출처 : 서울사진아카이브)
국풍81 당시 줄다리기의 모습. (출처 : 서울사진아카이브)

국풍81 참여와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1980년대 들어 기지시줄다리기에 대한외부 관심이 높아졌다. 특히 1981년 서울에서 열린 국풍81 축제에 참여해 큰 주목을받았다. 구자동 보유자는 “한강 고수부지에서 일주일 동안 줄다리기를 하며 비를 맞고줄이 끊어지면 당진으로 돌아가 보수했다”고 회고했다. 이 행사 이후 기지시줄다리기는 대한민국의 화합과 단결 상징으로 인정받아 1982년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75호로 지정됐고, 이우영 선생은 예능 보유자 1호로 선정됐다.

계승의 위기와 ‘판을 키우는’ 도전

2000년대 이우영 선생의 별세 후, 구자동보유자는 홀로 남았다. 위기를 직감한 구 보유자는 단순한 계승을 넘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를 목표로 ‘판을 키우자’는 도전에 나섰다. 당시 기지시줄다리기 행사는 열악한 환경에서 열렸고, 구 보유자는군수와 협의해 줄다리기 박물관 부지 확보에 나섰다.

마침 서해안고속도로 개통과 맞물려 진행된 내포문화권 특정지역개발계획이 박물관 건립에 전환점이 됐다. 우연히 집어 든신문에서 해당 계획의 심포지엄 소식을 접한 구 보유자는 홍성 심포지엄을 찾았고 그곳에서 만난 임동권 교수를 통해 개발계획의 추진 방향을 듣고, 당진시 공무원, 송영진 국회의원과 함께 시연장 건설을 추진했다. 이후 기지시줄다리기 시연장이 정신문화창달 사업에 포함돼 건설이 진행됐다.

구 보유자는 기록의 중요성을 강조하며박물관 건립을 적극 주장했고, 2011년 4월8일 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그는 “박물관이건립되기까지 기공식부터 준공식까지 한번도 빠지지 않고 공사 현장을 찾았다”며개관을 가장 보람된 순간으로 꼽았다.

2021년 구자동 보유자가 문화훈장을 수여 받았다.
2021년 구자동 보유자가 문화훈장을 수여 받았다.

60여 년간 기지시줄다리기에 매진

구자동 보유자는 60년 넘게 기지시줄다리기 보존과 전승에 헌신했다. 가족에게 환영받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함께해준 가족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는 기지시줄다리기 추진위원회 간사, 이수자, 전수교육조교를 거쳐 2001년 국가무형문화재 제75호 기·예능 보유자(인간문화재)가 됐고,2015년에는 그가 꿈꿔온 기지시줄다리기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가 현실이 됐다.

기지시 줄다리기 유네스코 등재 확정을 받은 당시
기지시 줄다리기 유네스코 등재 확정을 받은 당시

전통을 지키는 사명

구자동 보유자는 10년 전만 해도 전수생확보가 어려워 전통이 사라질까 걱정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2016년과 3년 전 각각전수생 10명이 들어와 지금도 활동 중이다.다만 최근에는 문화재청에서 단체 종목에‘전승교육사’, ‘조교’, ‘보유자’ 지정을 중단해 제도 복원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현재 보유자 세 명과 조교 두 명이 모두 작고한 가운데, 자신만 남아 조바심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38명의 전수자들이 헌신하며우리 문화유산과 유네스코 등재 유산을 함께 지키고 있다”며 감사와 자부심을 전했다. 마지막으로 “줄다리기는 500년 역사를가진 우리의 삶이자 소중한 전통문화로, 반드시 영구히 보존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75호 기지시줄다리기 보존회 회원들.
중요무형문화재 제75호 기지시줄다리기 보존회 회원들.

>> 구자동 보유자는

-1943년 송악읍 가교리 출생

-기지초, 송악중 졸업

-1969년 기지시줄다리기 추진위원회 간사

-1987년 기지시줄다리기 이수자

-1988년 기지시줄다리기 전수교육조교

-2001년 국가무형문화재 재75호 기지시줄다리기 예능보유자 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