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진시 우두3통. 당진 도심과 가까운 이 마을은 현재 40여 가구, 150여 명이 살아가는 소규모 농촌 마을이다. 이곳은 한때 바닷물이 밀려오고 배가 정박하던 선창이 있었고, 배를 건조하고 곡식을 실어 나르던 뱃사람들의 집이 줄지어 있었던 번성한 지역이었다. 지금은 노인이 대다수인 고령 마을로 전락했지만, 이 마을에서 70년을 살아온 김회식(70) 경로회장과 80여 년을 넘게 지켜온 손종길(82) 전 경로회장, 그리고 전희순(69) 통장과 마을 주민들의 마을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지명 유래 및 고대 기록
‘우두(牛頭)’라는 지명은 문자 그대로 ‘소의 머리’라는 뜻으로, 지형이 소머리처럼생겼다고 해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대동지지』(조선 후기 지리지)나『해동지도』 등에 따르면 이 일대는 조선시대 면천군 동하면 우두리로 편제돼 있었으며, 농업과 수로 교통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당진군 당진면 우두리로 개편됐고, 이후 1970년대 행정 개편을 거쳐 우두1·2·3통으로 나뉘게됐다.
북창포구와 수운의 기억
우두3통의 과거는 ‘북창포구’(또는 북창나루)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조선 후기에 당진천과 역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 북창포구는 내포 지역과 당진항, 아산만 일대 물류를 연결하는 포구로 기능했다. 이 포구를 통해 쌀, 소금, 어패류 등이 운반됐고, 조운선의 보조 기착지 역할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선창 주변은 자연스럽게 배 수리 및 건조 장소로 활용됐다. 어린 시절 마을 주민들은 배를 만드는 목수들을 도와 밥을 얻어먹기도 하고, 못을 주워 펴서 집으로 가져가는 일도 흔한 풍경이었다.
손종길 전 경로회장은 “당진천 상류 일대 솔밭에서 벌목한 나무를 물길을 따라 띄워 채운교까지 운반했다. 당시 태성호 1호와 2호가 건조 됐다”라며 “그당시 목수들은 ‘박나무’로 알려진 단단한 재목을 이용해 틈새를 메웠고, 배 못은 대장간에서 특별히 주문 제작한 넙적하고 끝이 구부러진 형태로, 두드려 박았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서면서 역천 하구가 간척되고, 육상 교통이 발달하면서 포구 기능은 점차 사라졌다.
채운교로 불리게 된 사연
손종길 전 경로회장은 ‘채운교’라 불리게 된 이유과 채운교와 얽힌 이야기도 전했다.
손종길 전 경로회장은 “당시 다리 인근에는 주막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에서 태어난 주막집 딸의 이름이 ‘채운’이었다”라며 “이 딸이 자라면서 넉넉지 않은 살림 속에서도 어려운 이들에게 밥과 술을 나눠주며 따뜻한 마음씨로 마을과 선창을 드나들던 뱃사람들 사이에 큰 감동을 줬다. 그녀의 선행은 입소문을 타고 멀리 인천 바닷가까지 전해졌다”고 말했다. 이후 마을 사람들과 뱃사람들은 그 다리를 ‘채운교’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대동샘과 당산
마을 중심에는 300여 년 전부터 물이 솟던 샘이 있다. 주민들은 이곳을 ‘대동샘’이라 부르며 공동 우물로 사용해왔다. 대동샘은 단순한 식수원이 아닌 공동체의 사랑방이었다. 아낙들은 샘에서 빨래하며 담소를 나눴고, 더운 여름이면 아이들을 불러 등목을 시키기도 했다.
또한 젊은 처자들이 늦은 밤 목욕을 하던 장소이기도 했다. 이와 함께 대동샘은 제사에도 쓰였다.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러 떠나는 사람들은 당재에 올라 제를 지냈고, 샘의 물로 정화했다. 최근 마을에서는 대동샘을 복원하고자 했지만 사유지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절반은 한 주민의 땅이지만 허락을 받지 못해 보조사업도 무산된 상태다.
과거의 생활상과 어린 시절 기억
손종길 전 경로회장은 “당시 아이들은 선창 인근에서 배 수리 이후 남은 못을 주우러 다니거나 갯벌에서 마을 또래 아이들과 뛰어 놀았다”라며 “조업을 나가는 배들이 고사를 지내는 날이면 고사떡을 얻어먹기 위해 늦은 밤까지 기다린 적도 있었다”고 회상했다.
김회식 경로회장은 “우두3통이 읍민체육대회가 열리면 1위나 2위를 놓친 적이 없었다”라며 “갯벌에서 뛰어 놀던 체력을 바탕으로 체육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냈다”고 말했다.

농악대의 북소리와 공동체 축제
우두3통에는 예전부터 농악대가 존재했다. 이 농악대는 마을 행사 때마다 중심이 됐다. 정월 대보름이면 농악대를 선두로 대동제를 지내고 마을을 도는 지신밟기를 하며 풍년과 복을 기원했다. 농번기에는 일손을 돕는 이들에게 농악 소리로 흥을 돋우고, 혼례나 상례 때도 빠지지 않았다. 마을 농악대는 당시 청년층이 중심이었으며, 중요 행사에 빠지지 않고 공연을 했다. 특히 기지시줄다리기 행사가 열리는 날에 는 마을에서부터 기지시까지 농악을 울리며 갔다.

당시 농악대에서 활동했던 백순자(80) 어르신은 “참 재미있었던 시기”라며 “여기저기 풍물공연도 나가고, 공연 나가면 공연비도 받았다”고 말했다.
황귀자(80) 어르신도 “두살 된 아들을 업고 다니며 농악대 활동하며 힘들었지만 즐거웠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당산과 민속 신앙
마을에는 대동샘 위쪽 당산이 있다. 과거 제단이 있었던 성스러운 곳으로 주민들은 “거북이 형상의 산에서 돌 하나만 옮겨도 집안에 화가 닥쳤다”고 입을 모았다. 실제로 방파제 공사를 위해 돌을 캐다가 선박이 좌초해 세 명이 사망한 일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런 전설은 당산이 단순한 지형이 아닌 마을의 정기를 지키는 존재로 여겨졌음을 보여준다.

민속과 마을 전통
과거 우두3통은 마을 안에 있는 ‘양지말’, ‘음지말’ 두 자연부락 중심으로 나뉘었고, 각각 독립적인 제사 문화와 당산제를 지냈다. 정월 대보름 즈음에는 고싸움, 풍물놀이, 쥐불놀이 등의 세시 풍속이 전승돼 왔으며, 마을 주민들이 함께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공동 굿당이 존재했던 기록도 있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시기에는 청년회·자위대 형태의 조직이 마을을 방어하는 데도 기여했다고 구술자료에 전해진다.
교육열과 인물 배출
우두3통은 작지만 교육열이 높았다. 교장 출신과 대학 교수 출신, 그리고 MBC 방송 영어 강사도 이 마을 출신이다. 특히 인간문화재 김호성 씨와 손종길 전 경로회장의 딸 손미애(테니스 국가대표), 사위 양주식(한국중고테니스연맹 부회장) 등 체육·예술 분야에서도 인물이 배출됐다. “돈이 없어도 땅을 팔아서라도 자식을 가르쳤다”는 주민의 말은 당시 교육에 대한 집념을 엿볼수 있다.
최근 도로 개설이 계획되면서 마을이 반으로 쪼개질 위기에 놓여 있다. 한때 80여 세대가 살았던 마을은 지금 43가구, 빈집만 13채다. 초등학생은 단 두 명뿐이며, 노인들이 경로당을 채운다.
전희순 통장은 “젊은 사람들이 와서 살아야 마을이 산다”며 “대동샘 복원, 공동체 재생, 귀농자 유치 등 여러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고 바람을 전했다.
※ 이 기사는 충청남도 지역미디어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취재·보도합니다. 해당 기사는 유튜브 ‘당진방송’ 채널을 통해 영상으로도 보실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