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2016년부터 당진시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다. 면천읍성 해설에는 ‘골정지’와 ‘건곤일초정’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답답할 때가 있다. 왜 건곤일초정이냐는 질문이 그렇다. 건곤일초정이란 구절은 두보가 양서로 이사와, 초가집 벽에 적은 시로, 일대의 풍광을 노래하면서 신세를 한탄한 시에 나온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다. 이런 일도 있었다. 면천군수 연암 박지원은 처음에 이 정자를 ‘취옹희우우사정’이라고 정했는데, 왜 ‘건곤일초정’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이렇다 할 답을 내놓을 수 없어 더 답답할 뿐이었다.

면천군수 박지원은 1800년 봄, 골정지를 준설하고 대를 쌓고 정자를 세웠다. 그 정자에 ‘취옹희우우사정(醉翁喜雨又斯亭)’이라는 현판을 달고자 했다. 이는 늙어 조금만 취해도 쉽게 취하는 ‘취옹(醉翁)’의 풍류와, 사흘 동안 내린 비 끝에 완성된 정자에 대한 기쁨을 담은 ‘희우(喜雨)’, 두 일을 겸했으므로 이를 합친 일곱 글자였다. 연암은 당시 충청감사 김이영에게 현판 제작과 단청을 부탁하는 편지를 썼다(《연암집》-答巡使書). 그런데 ‘건곤일초정(乾坤一草亭)’이라는 다섯 글자로 바뀌었다(《나의 아버지 박지원》). 《나의 아버지 박지원》은 아들 종채가 아버지의 가르침을 기록한 《과정록(過庭錄)》을 번역한 책이다. 이외는 건곤일초정과 관련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그 이유를 명확히 알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여러 변수를 가정해 이유를 추정해 봤다.

첫째, 충청감사의 입장이 변수로 작용했을 수 있다. 연암이 지은 애초의 정자 이름은 문인적 멋과 개인적 풍류를 담았지만, ‘취옹’이라는 표현은 음주와 노년을 연상케 하여 관료 사회에서 부담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일곱 자의 긴 이름은 현판 제작과 단청에 더 많은 수고와 비용이 요구되기 때문에, 보다 간결하고 품격 있는 이름이 선호되었을 수 있다. 간단하게 말하면 거절한 것이리라.

둘째, 연암 자신이 친구 홍대용에 대한 그리움과 추모를 담아 이름을 바꿨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연암과 담헌 홍대용의 벗 사귀기는 조선의 지성사에서 큰 족적을 남겼을 만큼 유명하다. 담헌은 말년에 천안의 초가를 ‘건곤일초정’이라 이름 짓고, 자신을 ‘건곤일초정주인’이라 칭하며, ‘건곤일초정주인’이라는 시를 남겼다. 연암은 담헌 사후에 담헌의 문집 정리에 참여했기에 분명히 이 시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시는 담헌의 문집인 《담헌서》에 수록돼 있다. 연암은 충청감사의 태도가 미온적이자 ‘건곤일초정주인’을 떠올리며, 단순한 풍류의 정자를 벗을 기리는 상징적 공간으로 재해석했을 수 있다. 즉, ‘취옹희우우사정’이 개인적 취향과 풍류를 담았다면, ‘건곤일초정’은 세상과 벗, 학문과 삶을 담아내는 더 깊은 의미를 지니게 된다.

셋째, 정자의 목적과 공공적 성격을 반영했을 가능성도 있다. 정자는 단순한 개인적 쉼터가 아니라, 주변 연못을 준설하고 백성들의 농사에 도움을 주는 실용적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하늘과 땅 사이 한 칸 초가’라는 뜻의 ‘건곤일초정’이 백성을 위한 실용적 의미를 담는 데 더 적합했을 수 있다. 백성들과 함께 이루어낸 준설 작업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이름을 단순화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주변 유생이나 지인들의 조언 역시 영향을 주었을 수 있다. 당시 연못과 정자를 알고 있던 지역 유생들은 홍대용의 초가와 시를 기리는 의미에서 ‘건곤일초정’이라는 이름을 권유했을 수 있으며, 연암은 이를 받아들여 새로운 이름으로 정자의 의미를 확장했을 가능성이 있다.

결국, ‘건곤일초정’이라는 이름은 충청감사의 미온적 반응과 실용적 판단, 그리고 연암 자신이 벗 홍대용에 대한 그리움과 백성을 위한 공공적 목적을 동시에 담으려 한 결과로 추정된다. 단순한 풍류에서 벗어나, 하늘과 땅, 인간과 학문의 교감을 담은 이름으로 ‘취옹희우우사정’은 ‘건곤일초정’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이는 한 지식인이 벗에 대한 깊은 그리움과 공공을 향한 섬세한 마음, 학문적 이상을 동시에 담아낸 결정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