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 그림으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김범석 씨
퇴직 후 그림으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김범석 씨

발전소에서 35년 8개월간 기계 직군으로 근무한 김범석 씨는 지난 3월 만 60세에 정년퇴직했다. 은퇴 후 그는 그림을 비롯한 다양한 취미로 자신을 돌보는 시간을 채워가고 있다.

2001년 동서발전 배치로 당진 정착

서울에서 나고 자란 그는 아버지의 바람으로 서울공업고등학교 기계과에 진학했다.

“1933년생이신 아버지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서울공고를 동경해오셨어요. 자연스럽게 저도 그 학교로 진학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기계과를 졸업한 그는 1989년 한국전력공사에 입사해 강원도 영월에서근무를 시작했다. 이후 IMF 외환위기 속 사업장 재편으로 안양·제주·서울 등 여러 지역을 거쳤고, 2001년 석문면에 있는 한국동서발전에 배치돼 당진에 정착했다. 그는 “사내 규정상 일정 기간이 지나면 근무지를 옮겨야 하는데 당시 당진에선 9·10호기 신규 건설이 한창이었고, 현장감독을 맡게 되면서 장기 근무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결국 25년을 당진에서 보내며 이곳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오래 머문 제2의 고향이 됐다.

임금피크제 기간에 만난 ‘그림’

직장 생활 동안 김 씨는 일 외의 시간을 생각해볼 여유가 거의 없었다.그는 “입사 초기 기업 문화는 사실상 군대보다 더 경직돼 있었다”며 “회사라는 틀 안에서 나만의 무언가를 추구하기란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내 일은 누군가 대신해줄 수 없다는 생각과 완벽을 추구하는 성향으로 업무에 집중하는 생활이 수십 년 반복됐다”고 설명했다.

수십 년간 반복된 직장 중심의 생활은 자연스럽게 그를 회사에만 머물게 했고, 취미나 개인 활동은 마음속에만 묻혀 있었다.

“정년퇴직한 선배들이 종종 회사에 찾아오곤 했어요. 재취업하거나 사업을 시작한 분들도 있었지만, 연락이 끊기고 특별한 활동 없이 지낸다는 이야기도 간접적으로 들었습니다.”

그는 이런 사례를 보며 자신의 퇴직 후 삶을 고민했지만 뚜렷한 그림을 그리기 어려웠단다.

만 58세 이후 시행되는 임금피크제 기간을 맞으며 그는 가장 먼저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했다. 당시 주 3일만 근무하면 됐고 재택근무를 신청해 상대적으로 여유가 생겼다.그는 “남는 시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유튜브에서 어반스케치 영상을 보게 됐다”며 “그걸 따라 그리며 독학으로 그림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림 그리며 몰입의 시간”

그는 점점 그림에 빠져들었다.

“정년이 다가오니 재취업에 도움이 될까 싶어 사회복지사·요양보호사·드론·바리스타 등 여러 자격증을 취득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적성에 맞는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림은 달랐다. 김범석 씨는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는 무념무상의 상태가 된다”며 “새벽 1시가 넘은 줄도 모를 만큼 몰입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어 “엔도르핀이 솟는 느낌도 들고, 스스로 힐링이 됐다”고 덧붙였다.

김범석 씨는 임금피크제를 시작한 지 약 6개월이 지나 당진의 평생학습 플랫폼 ‘배움나루’를 알게 됐다. 당진의 주민자치센터, 도서관, 평생학습관, 복지기관 등이 제공하는 강좌를 한눈에 조회하고 신청할 수 있는 플랫폼이다. 이를 통해 그는 매주 금요일에는 라인아트, 목요일에는 유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전엔 그림을 배워본 적이 없었어요. 유화의 진득하고 강렬한 질감이 좋았고, 라인아트는 섬세한 선을 익히면서 실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됐습니다.”

“좀 더 일찍 시작했다면…”

김범석 씨는 그림을 시작하고 비로소 자신을 위한 시간을 보내는 법을 알게 됐다고 전했다.

“어릴 때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기억이 새삼 떠오르더라고요. 사생대회에서 상도 받았고요. 그런데 30년 넘게 가족을 위해 회사에만 집중하다 보니 저를 위한 지출은 생각하기 어려웠어요. 퇴직하고 나서야 비로소 ‘나를 위해 보상을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림은 그런 보상 같은 존재예요”

이어 그는 뒤늦은 아쉬움도 꺼냈다. “왜 그림을 좀 더 일찍 시작하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 아닌 후회도 했다”며 “회사에 다닐 때 아무리 바빴더라도 사실 퇴근 이후나 휴일을 활용해 취미 활동을 시도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개인 채널 만들고 싶어”

그의 즐거움은 새로운 활동으로 이어졌다. 지난해 유난영 라인아트 강사의 제안으로 충남콘텐츠연구소 지음협동조합 영상 삽화 작업에도 참여했다. 김범석 씨는 “내 실력으로 방송 삽화를 그린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생각했다”며 “그런데 선생님이 충분하다고 격려해주셔서 용기 내 참여했다”고 말했다. 그 결과 총 네 차례 삽화 작업을 맡았다. 이 경험을 계기로 새로운 꿈도 생겼다.

“그림을 그리다 보니 더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어요. 처음 어반스케치를 유튜브로 배웠던 것처럼, 제 채널을 만들어 콘텐츠도 운영 해보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김범석 씨는 “퇴직 후에는 무료함이나 우울함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이 있다”며 “미술이든 악기든, 자신이 몰입할 수 있는 한 가지를 반드시 찾아서 ‘나를 위한 시간’을 꼭 만들기를 바란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