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주>
마을을 품고 있는 산과 들, 오랜 세월 이어져 온 지명 속에는 저마다의 유래와 전설, 그리고 잊혀진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그러나 산업화와 도시화 속에 사라진 마을, 사라질 위기에 놓인 마을, 농촌 고령화로 전통의 맥이 끊길지 모르는 자연마을들이 늘어나고 있다. 본지는 ‘마을 아카이브 IV - AI 디지털 기록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당진지역 마을의 역사·문화·인물·전설·생활사를 기사와 영상으로 기록하는 ‘우리마을 이야기’ 기획취재를 연재한다. 영상은 유튜브 ‘당진방송’을 통해 시청할 수 있다.
※ 이 기사는 충청남도 지역미디어사업 지원을 받아 취재·보도됩니다.
신평면 금천리는 한자로 ‘쇠 금(金)’ 자와 ‘내 천(川)’ 자를 쓴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오래전부터 ‘쇠냇골’이라 불렸다. 하상용 신평시장번영회장은 “냇물에 철 성분이 많이 섞여 흘렀다고 해서 금천리가 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금천리가 새롭게 솟아나는 샘물처럼 다시 살아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금천리는 신평시장이 자리한 생활 중심지이자 망객산 자락과 맞닿아 있는 마을이다. 주민들은 “금천리를 알려면 시장과 산, 그리고 사람 이야기를 함께 봐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100년 신평시장, 이성근이 세운 장터의 역사
신평시장은 지난해 개장 100주년을 맞았다. 주민들은 지금도 “예전 장날에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다녀야 했다”고 기억한다. 어린 시절 금천리에서 살았지만 현재 신흥2리 이장으로 활동 중인 이병섭 이장은 “몸 사이로 지나가고 다리 밑으로 기어다니다시피 할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고 회상했다.
신평시장의 출발에는 지역 인물 이성근의 역할이 컸다. 향토문화전자대전에 따르면 이성근은 충남 당진 신평면 한정리 출신으로 합덕성당 안 매괴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을 자주 오가며 시장의 중요성을 체감했다. 이후 1926년 금천리에 시장 개설을 위해 힘썼고 시장 활성화를 위해 도로 확장에도 앞장섰다.
특히 송악읍 전대리와 신평면 금천리를 연결하는 길이 50m 규모의 목조다리 설치를 추진하며 공사비 당시 금액으로 1030원을 직접 희사했다. 당시 인부 하루 품삯이 30전 수준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막대한 금액이었다. 이를 기려 신흥리 주민과 신평시장 상인들이 세운 기념비가 현재 신평면 행정복지센터 앞에 남아 있다.
정근옥 대한노인회 당진시지회 신평면분회장은 “이성근 선생 같은 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신평시장이 있었다”며 “시장을 만든 사람들의 정신까지 함께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탕가루 하나 얻어먹으러 시장 갔지”
시장에는 삶의 추억도 남아 있다. 정근옥 노인회장은 “옛날에는 시장 오는 재미가 사탕가루 하나 얻어먹는 거였다”며 “지금 흑설탕 같은 당원을 어머니, 할머니가 감춰놓으면 몰래 꺼내 먹던 기억이 있다”고 웃었다.
또 하상용 회장은 “겨울이면 도시락 반찬이 거의 김이었다. 지금은 매립됐지만 그땐 바닷가여서 이 근처에 김 공장이 있어 다들 맨밥에 김만 싸 왔다”며 “지금 생각하면 힘들었지만 그게 다 추억”이라고 말했다.
현재 백년양조장이라 불리는 신평 명소인 신평양조장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이병섭 이장은 “옛날엔 막걸리 한 잔도 귀했다”며 “양조장에 가서 사장님께 인사드리고 소금을 안주 삼아 막걸리 한 잔 얻어먹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김복선 바위, 사라진 금천리의 전설
금천리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이름은 ‘김복선’이었다. 주민들에 따르면 김복선은 신평 이씨 집안의 노비였지만 풍수지리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인물로 전해진다. 일부 구전에는 이순신 장군, 율곡 이이와 함께 망객산에서 나라의 앞날을 논했다는 이야기도 남아 있다.
특히 망객산 자락에 있던 ‘김복선 바위’는 주민들에게 특별한 기억이다. 실제로 신평 이씨 종가의 자손인 이병섭 이장은 “둘째 큰집이 바위 50m 아래에 있어 사촌들과 늘 그 바위에 올라 뛰어놀았다”며 “사방 12m쯤 돼서 사방치기하고 놀기에 딱 좋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삽교천 방조제 건설 시기 석산 개발과 함께 바위는 발파돼 흔적 없이 사라졌다. 당시 그 현장을 목격한 이 이장은 “바위를 터뜨릴 때 빨간 철분 물이 흘러나왔다”며 “사람들은 김복선의 피눈물이라고도 했다”고 회상했다. 이어 “지금까지 남아 있었으면 신평의 큰 관광명소가 됐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등에 적힌 죽음의 편지, 결혼 허락으로 바뀌다
김복선 이야기에는 해학도 있다. 주민들 사이에 전해오는 설화에 따르면 어린 김복선은 주인 양반을 따라 한양에 갔다가 장난을 쳐 미움을 샀다. 화가 난 주인이 그의 등에 ‘돌아오는 즉시 죽이라’는 글을 적어 고향으로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길에서 물에 빠진 스님을 구했고 스님은 등에 적힌 글을 읽어본 뒤 내용을 ‘내려오는 즉시 우리 딸과 혼인시키라’로 바꿔줬다고 한다. 결국 김복선은 주인집 딸과 혼인하게 됐다는 이야기다.
하상용 회장은 “당시 어르신들에게 들은 이 이야기는 양반과 상민 사회를 풍자한 조선시대식 해학 설화 같다”고 평가했다.
망객산 넘던 아이들, 귀신보다 무서운 통학길
신평면을 품은 망객산은 금천리 사람들의 삶과 붙어 있었다. 이병섭 이장은 “우리 동네에서 나만 신평초등학교를 다녀서 늘 망객산을 넘어 통학했다”고 말했다.
그는 “낮에도 혼자 넘으면 무서웠다. 성황당 앞을 지날 때는 돌 하나씩 던지고 갔다”며 “빨간 끈, 파란 끈이 걸려 있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했다. 또 “어릴 때는 망객산 정상에서 온양, 평택, 서산까지 훤히 보였다”며 “지금은 나무가 자라 팔각정에 올라야 겨우 보인다”고 말했다. 망객산의 산줄기 중 서북부는 금천리와 맞닿아 있다.
바다가 사라지고 갯벌 기억만 남았다
삽교천 방조제가 생기기 전 금천리 일대는 바다와 갯벌의 기억이 짙었다. 주민들은 게를 잡고, 조개를 캐고, 갯골을 건너다 위험한 순간도 많았다고 말했다.
이병섭 이장은 “그이(게) 구멍에 팔을 깊숙이 넣어야 잡을 수 있었다”며 “큰 갯골에 물이 먼저 차면 생사가 오갈 만큼 위험했다. 지금도 가끔 악몽을 꾼다”고 말했다.
하상용 이장도 “그이는 충청도 말인데 게라고 한다. 어머니가 게를 잡아오면 마당에 풀어놓았고 새끼 게가 돌아다니는 걸 갖고 놀았다”고 회상했다.
마지막으로 주민들은 “신평시장이 전통문화를 다시 살리는 시작점이 됐으면 좋겠다”며 “젊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마을, 김복선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서 지금 지어지고 있는 농촌활성화거점센터에서 함께 보고 시장도 함께 둘러보는 마을이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쇠퇴한 전통시장, 사라진 바위, 변해버린 바다 풍경. 하지만 금천리에는 여전히 이야기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금천리와 신평시장으로 놀러 오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