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진시 퇴직공무원들이 시 산하기관과 위탁기관, 유관 단체 핵심 요직을 잇따라 차지하면서 지역 시민사회의 전문적 역량이 설 자리를 잃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단순한 ‘자리 차지하기’를 넘어 민간 영역이 행정의 연장선으로 굳어지는 구조적 문제라는 지적이다.
지난 3월말 당진시는 당진시의회에 제3기 당진시 시민고충처리위원 위촉 동의안을 제출하고 장 모 전 경제국장과 하 모 전 건설과장을 임명했다. 두 사람이 시민고충처리위원으로 내정됐을 당시부터 논란은 있었다. 당진시청 국·과장 출신이라는 점에서 시민 관점의 독립적 고충 처리보다 행정 편의 중심의 운영이 되지 않겠느냐는 비판이다.
탄소중립·농촌·체육·상공회의소까지 ‘관’일색
이뿐만이 아니다. 당진시 탄소중립 지원센터 탄소중립 분과장에는 인 모 전 석문면장이, 당진화력민간환경감시센터 분과장에는 김 모 전 환경과장이 각각 재직 중이다. 인 씨와 김 씨는 지난 3월경부터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여기에 당진시체육회 사무국장에 최 모 전 교통과장이, 당진상공회의소 사무국장에는 김 모 전 안전총괄과장이, 당진시농촌활성화지원센터 센터장에는 이 모 전 자치환경국장이 자리 잡았다. 신활력추진단에도 얼마 전까지 김 모 전 부읍장이 단장을 맡은 바 있다. 시 출자출연기관 비상임 이사직에도 퇴직공무원들이 포진해 있다.
시민 영역이 ‘행정의 연장’으로
문제의 핵심은 단순한 자리 차지하기가 아니다. 해당 기관과 유관 단체들의 설립 취지상 지역 현장의 목소리를 담고 이를 반영해야 하는 기관들이다. 그런데 이 자리가 퇴직공무원으로 채워지면 기관의 운영 논리가 자연스럽게 행정 논리로 수렴된다.
퇴직공무원들은 수십 년간 공직 내부의 절차와 관행, 사업 방식에 익숙해진 사람들로 이들이 산하기관장이나 사무국장을 맡으면 해당 기관이 행정의 의중을 파악하고 이에 순응하는 방향으로 운영될 가능성이 높다는데 있다. 특히 시민사회의 유연함과 자율성 아래 본래 역할 대신 행정이 추진하는 사업을 매끄럽게 대행하는 기관으로 전락할 우려가 생기는 것이다.
공모사업 대행기관 전락 우려
이 문제는 재정 구조와도 맞닿아 있다. 일부 기관들은 운영비의 상당 부분을 중앙부처와 지방자치단체의 공모사업으로 충당한다. 기관장이나 사무국장이 행정 출신 인사로 채워지면, 예산을 쥔 행정과의 관계가 더욱 종속적이 된다. 공모사업 수행을 위해서는 행정의 요구와 방향성을 수용해야 하며, 시민과 지역사회의 역량을 강화하고 공동체의 의식을 높여 건강하고 발전적인 지역사회를 만드는데 이바지하기 보다는 단순한 사업 대행 기관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이 구조가 굳어지면 기관은 지역 주민과 시민의 필요를 먼저 살피기보다 행정이 원하는 방향의 사업을 기획하고 수행하는 데 집중할 수밖에 없다. 지역에서 실질적 영향력을 가져야 할 민간 거점 기관이 사실상 행정의 외주 실행기관으로 작동하는 셈이다.
한 출연기관 직원은 “전문성과 능력이 떨어지는 공무원이 공기업·출자·출연기관에 낙하산으로 임명되는 관행을 끊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민간 전문가 성장 사다리 끊겨
전문가들은 이런 문제가 장기화되면 지역사회 내 민간 전문가 생태계 자체가 위축된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농업과 환경, 체육, 지역경제 분야에서 오랜 현장 경험을 쌓은 지역 민간 전문가들이 지역 기관의 중책을 맡을 기회가 원천적으로 차단되기 때문이다. 그 자리가 퇴직 공무원에게 먼저 돌아가는 관행이 반복될수록, 지역에서 전문성을 키워 온 시민들이 지역 안에서 역할을 찾기보다 다른 곳으로 떠나거나 활동을 포기하는 상황이 이어질 수 있다.
지역의 전문가가 없다면 외부 전문가를 공개 모집하는 방식도 있다.
당진시의회 조상연 의원은 이 같은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해 왔다. 조상연 의원은 “당진시에서 위원회와 전문가를 위촉, 또는 모집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방식의 공고를 통해 전문가를 위촉할 수 있음에도 소극적이고 폐쇄적으로 진행했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한 전문가는 “퇴직 공무원의 재취업을 전면 막는 제도화는 어렵다”면서도 “부작용을 최소화하도록 투명한 인사 검증 방안을 마련하고, 노골적인 재취업 의도에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공무원은 “퇴직 공무원들의 산하기관 재취업은 합법인가의 문제가 아닌 공직사회 신뢰의 문제”라며 “후배들에게 성실하게 행정 업무를 하는 것보다 관계를 잘 쌓는 것이 중요하다는 왜곡된 신호를 줄 수 있다”고 비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