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전이 계획한 '에너지 고속도로' 지도, 지도를 보면 결국 모든 경로가 용인으로 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제공- 당진환경운동연합 )
한전이 계획한 '에너지 고속도로' 지도, 지도를 보면 결국 모든 경로가 용인으로 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제공- 당진환경운동연합 )

<편집자주> 당진은 오랜 시간 국가 전력 공급의 중심 역할을 해왔다. 발전소는 지역에 들어섰지만 생산된 전기는 수도권으로 보내졌고, 그 과정에서 송전탑과 송전선로, 환경 부담은 지역 주민들의 몫이 됐다. 최근 정부가 추진하는 ‘에너지 고속도로’ 역시 같은 구조를 반복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당진시대는 송전선로 문제를 단순한 시설 입지 갈등이 아닌 지역 불균형과 에너지 전환의 문제로 보고 연재를 이어간다. 네 번째 순서는 정부가 말하는 ‘에너지 고속도로’의 실체와 지역사회가 제기하는 문제점을 살펴본다.

정부와 한국전력은 재생에너지 확대에 맞춰 전국 전력망을 연결하는 사업을 ‘에너지 고속도로’라고 부른다. 이름만 들으면 지역과 지역이 전기를 자유롭게 주고받는 미래형 전력망처럼 보인다. 그러나 충남지역 시민사회는 현실은 다르다고 지적한다.

이들이 문제 삼는 핵심은 ‘고속도로’라는 표현과 달리 실제 계획이 양방향이 아닌 일방향 구조에 가깝다는 점이다. 전남·전북 등 재생에너지 생산지역과 충남 등 기존 발전지역에서 생산된 전기를 수도권, 특히 용인 반도체 국가산업단지와 같은 대규모 전력 수요지로 보내는 구조라는 것이다.

유종준 충남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은 “고속도로라면 오가는 길이어야 하는데 지금의 에너지 고속도로는 지방에서 수도권으로 전기를 보내는 일방통행에 가깝다”며 “재생에너지 시대에는 지역끼리 전기를 주고받는 분산형 구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해저 케이블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에너지 고속도로 논의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HVDC(초고압직류송전·전기를 먼 거리까지 효율적으로 보내는 송전 방식) 이다.

정부는 해저 케이블을 활용한 HVDC가 송전선로 갈등을 줄일 수 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모든 전력을 해저 케이블만으로 보낼 수는 없다고 말한다. 전력망은 갑작스러운 전력 수요 변화에도 안정적으로 운영돼야 하는데 이를 계통 안정성(전력망이 멈추지 않고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상태) 이라고 한다.

전문가들은 계통 안정성 확보를 위해 결국 일부 구간은 육상 송전망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현재 충남에서는 태안을 제외한 대부분 시·군이 송전선로 계획과 관련해 직·간접적으로 거론되고 있다. 금산과 공주, 홍성, 예산 등에서는 이미 주민대책위가 구성됐고 충남 송전탑 백지화 대책위원회도 활동 중이다.

당진은 아직 구체적인 노선이 공식 발표되지 않았지만 지역 시민사회는 향후 검토 대상이 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황성렬 충남환경운동연합 상임대표는 “당진이 가만히 있으면 결국 저항이 적은 지역으로 노선이 밀려올 수 있다”며 “어느 지역을 통과하느냐보다 계획 자체가 필요한지 먼저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독일과 한국은 무엇이 다른가

정부는 송전망 확충의 근거로 독일 사례를 자주 언급한다.

독일은 북부 풍력발전 전력을 남부 산업지역으로 보내기 위해 대규모 송전망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북부와 남부를 연결하는 약 700㎞ 규모의 초고압직류송전망 사업인 ‘수드링크(SuedLink)’가 있다.

하지만 시민사회는 독일과 한국의 상황은 다르다고 주장한다. 독일은 이미 존재하는 산업단지가 화석연료 중심 전력에서 재생에너지 중심 전력으로 전환하기 위해 송전망을 확충하는 구조다.

반면 한국은 수도권에 새롭게 조성되는 대규모 산업단지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전국에 새로운 송전망을 건설하는 구조라는 것이다.

유종준 사무처장은 “독일은 산업의 에너지 전환을 위한 송전망이지만 한국은 수도권 집중을 위한 송전망에 가깝다”며 “재생에너지가 생산되는 지역에 산업을 분산 배치하는 논의가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반도체 산업은 꼭 수도권이어야 하나

정부와 산업계는 반도체 경쟁력 강화를 위해 용인 반도체 국가산업단지 조성이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시민사회는 반도체 산업이 반드시 수도권에 집중돼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세계 최대 반도체 기업 중 하나인 대만 TSMC 역시 생산시설이 신주와 타이난, 가오슝 등 여러 지역에 분산돼 있다.

특히 최근에는 기업이 사용하는 전력의 100%를 재생에너지로 충당하겠다는 국제 캠페인인 RE100(Renewable Energy 100%) 참여가 늘고 있다.

시민사회는 재생에너지가 생산되는 지역과 산업단지를 함께 육성하면 송전망 부담을 줄이고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황성렬 상임대표는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을 위해서라도 특정 지역 집중보다 재생에너지 생산지와 연계한 분산 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보상금이 해답은 아니다

송전선로 갈등이 발생할 때마다 정부와 한전은 지원금과 보상책을 내놓는다.

그러나 기존 발전소와 송전선로 주변 주민들은 보상금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고 말한다.

화력발전소와 송전선로가 들어선 지역에는 특별지원금과 지역자원시설세, 송주법 지원 등이 이뤄졌지만 인구 증가나 지역 활성화로 이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오히려 주민들은 전자파 우려와 경관 훼손, 재산권 침해, 건강 불안 등을 꾸준히 호소해 왔다.

유종준 사무처장은 “돈 몇 푼이 주민의 건강과 행복을 대신할 수는 없다”며 “그동안 발전소와 송전선로가 들어온 지역이 정말 더 잘살게 됐는지 냉정하게 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당진은 또다시 ‘전력 생산지’에 머물 것인가

이번 논란은 단순히 송전탑이 어디를 지나가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화석연료 중심의 발전 체계에서 재생에너지 중심 체계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지역이 또다시 전력 생산과 송전만 담당할 것인지, 아니면 에너지를 활용한 새로운 산업과 일자리를 만들어낼 것인지의 문제다.

전남 일부 지역은 재생에너지와 산업단지를 연계한 지역 산업 전환을 추진하고 있다. 반면 충남은 여전히 발전소와 송전망 중심의 역할에 머물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당진은 이미 화력발전소와 송전선로로 국가 전력 공급 부담을 오랫동안 떠안아 온 지역이다.

앞으로 해상풍력 등 재생에너지 사업이 확대되더라도 생산된 전력이 다시 수도권으로만 보내진다면 지역에는 또다시 시설과 갈등만 남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황성렬 상임대표는 “에너지 전환은 위기이면서 동시에 기회”라며 “지역에서 생산한 에너지를 지역 산업과 연결하는 구체적인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유종준 사무처장도 “당진이 또 다른 에너지 식민지가 될 것인지, 에너지 전환 시대의 주체가 될 것인지는 지금의 선택에 달려 있다”며 “에너지 고속도로가 과연 누구를 위한 길인지 지역사회가 질문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