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오른쪽부터 문현수 이장, 문병태 명예면장, 이선군 송산면 개발위원장 ② 어촌마을이었던 동곡리, 나룻배를 타고 큰 배 로 옮겨 타는 모습 ③ 동곡리 주민총회 모습 ④ 동곡리 어린이들의 소풍 모습 (사진 출처= 이선군, 문병태, 문현수 제공)
① 오른쪽부터 문현수 이장, 문병태 명예면장, 이선군 송산면 개발위원장 ② 어촌마을이었던 동곡리, 나룻배를 타고 큰 배 로 옮겨 타는 모습 ③ 동곡리 주민총회 모습 ④ 동곡리 어린이들의 소풍 모습 (사진 출처= 이선군, 문병태, 문현수 제공)

<편집자주>마을을 품고 있는 산과 들, 오랜 세월 이어져 온 지명 속에는 저마다의 유래와 전설, 그리고 잊혀진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그러나 산업화와 도시화 속에 사라진 마을, 농촌 고령화로 전통의 맥이 끊길지 모르는 자연마을들이 늘어나고 있다. 본지는 ‘마을 아카이브 IV - AI 디지털 기록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당진지역 마을의 역사·문화·인물·전설·생활사를 기록하는 ‘우리마을 이야기’ 기획취재를 연재한다.

※ 이 기사는 2026년 충청남도 지역미디어사업 지원을 받아 취재한 것입니다.

동곡리(東谷里)는 한자로 ‘동쪽의 작은 고을’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하지만 주민들이 기억하는 동곡리는 단순한 농촌마을이 아니다. 삼면이 바다였고 집 앞을 나서면 갯벌과 바다가 펼쳐지던 어촌이었다.

동곡리 앞에는 ‘개머리’라는 지명이 있었다. 바다 쪽으로 튀어나온 지형이 멀리서 보면 개 머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송악 쪽에는 구지섬이 있었다. 섬에는 약재로 쓰이는 구지뽕나무가 많아 자연스럽게 구지섬이라 불리게 됐다고 한다.

이선군 송산면개발위원장은 “옛날에는 바다가 지금의 기지시 인근까지 들어왔다”며 “명산리 외나무다리도 바다를 건너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라고 설명했다.

지금은 논과 도로, 공장으로 바뀌었지만 주민들의 기억 속 동곡리는 여전히 바다마을이다.

굴·낙지·염전… 바다에서 먹고살던 시절

한때 동곡리는 농촌이면서도 어촌이었다. 농사는 주로 밭농사였다. 마늘과 담배를 재배했고 논은 많지 않았다. 대신 주민들은 바다에서 생계를 이어갔다.

굴과 조개, 낙지, 꽃게, 숭어는 물론 김 양식과 굴 양식도 활발했다. 한성염전에서는 천일염을 생산했다. 주민들은 염전에서 일하고 갯벌로 나가 조개를 캐고 바다에서 낙지를 잡으며 살아갔다.

문병태 명예면장은 “가난하긴 했어도 바다에만 갔다 오면 먹을 것이 있었다”며 “먹고사는 걱정을 크게 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문현수 이장도 “동곡리는 농촌이면서도 어촌이었다”며 “겨울에는 굴을 따고, 조개를 캐고, 낙지를 잡으며 쉬지 않고 일했다”고 말했다.

이선군 위원장은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저녁 반찬이 없어도 걱정하지 않았다. 바다에 나가면 굴도 있고 낙지도 있고 고기도 있었다”며 “바다가 곧 냉장고이자 시장이었다”고 말했다.

다툼보다 정이 많았던 마을

동곡리 주민들이 기억하는 마을의 또 다른 모습은 ‘공동체’다. 문병태 명예면장은 “예전에는 선배가 말하면 법처럼 따르던 시절이었다”며 “어른을 공경하고 이웃을 가족처럼 생각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동곡리에서는 이웃 간 다툼이 드물었다고 한다.

이선군 위원장은 “바다는 욕심을 부리지 않아도 먹고살 수 있을 만큼 풍요로웠다”며 “서로 경쟁하지 않으니 싸울 이유도 없었다”고 말했다.

심부름을 가면 밥 한 끼는 기본이었다. 잔칫집이 열리면 온 마을이 함께했다. 굴을 따러 가는 길에는 고구마를 쪄놓고 나눠 먹었고 김치가 떨어졌다고 하면 이웃이 김치를 가져다주기도 했다.

“한 집안처럼 살았지요.” 주민들의 설명 속 동곡리는 그런 마을이었다.

간척사업, 삶의 터전을 바꾸다

하지만 변화는 찾아왔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방조제 건설과 간척사업은 동곡리의 운명을 바꾸기 시작했다. 개머리와 구지섬 사이 바다가 막히고 농지가 조성됐다. 주민들은 바다가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문병태 명예면장은 “당시에는 사람이 직접 흙을 지게로 나르고 구루마로 옮기며 방조제를 쌓았다”며 “나도 공사 현장에서 일을 했다”고 말했다.

간척사업으로 농지가 생겼지만 정작 주민들은 큰 혜택을 누리지 못했다.

이선군 위원장은 “원래는 지역 주민들이 혜택을 받아야 했지만 전국 단위 분양이 이뤄졌다”며 “돈 있는 사람들이 땅을 가져가고 주민들은 임대농을 하거나 다시 땅을 사서 농사를 지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에게는 삶의 터전이었는데 결과적으로 밥그릇을 빼앗긴 셈이었다”고 말했다.

한보철강과 현대제철, 또 한 번의 변화

1989년 한보철강이 들어오면서 동곡리는 다시 한 번 큰 변화를 맞았다. 어장이 사라지고 바다를 잃은 주민들은 농업으로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이후 한보철강이 부도나고 현대제철이 들어오면서 동곡리는 산업도시의 관문이 됐다.

하지만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동곡리 주민 31가구가 이주해야 했고, 마을의 3분의 2 이상이 수용됐다.

문병태 명예면장은 당시 이장으로 활동하며 현대제철과 가장 먼저 자매결연을 맺었다.

“기업은 들어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민들이 받을 수 있는 혜택은 최대한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후 현대제철은 장학사업과 복지사업, 취업 지원 등을 통해 주민들과 관계를 이어갔다.

갈등을 넘어 상생으로

물론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초기에는 분진과 쇳가루 피해가 심했다. 주민들은 창문을 열어두면 방바닥이 새까매질 정도였다고 기억한다. 배추와 무가 피해를 입어 김장을 포기해야 했던 해도 있었다.

그러나 기업과 주민들이 지속적으로 협의하며 환경시설이 개선됐고 상생사업도 확대됐다.

이선군 위원장은 “예전에는 갈등도 많았지만 지금은 함께 살아가야 할 향토기업이라는 인식이 크다”며 “주민들과 기업이 서로 신뢰를 쌓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루터기처럼 남은 동곡리”

현재 동곡리에는 40여 가구, 8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한때 120가구가 넘었던 마을은 많이 작아졌다. 바다도 사라졌고, 염전도 사라졌다. 돌섬과 갯벌도 기억 속 풍경이 됐다.

하지만 주민들은 여전히 동곡리를 지키고 있다. 현대제철 부지로 수용돼 다른 곳으로 떠난 주민들과도 정기적으로 만나고, 마을의 역사를 함께 기억하려 애쓰고 있다.

문현수 이장은 동곡리를 ‘그루터기’에 비유했다.

“참나무나 밤나무는 베어져도 그루터기가 남습니다. 동곡리도 마찬가지입니다. 3분의 2가 사라졌다고 해도 남은 3분의 1이 옛 동곡리의 기억을 지키는 그루터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바다는 사라졌지만 사람은 남았다. 굴을 따고 낙지를 잡던 기억도, 이웃과 밥을 나눠 먹던 정겨운 풍경도 남아 있다. 동곡리는 오늘도 그 기억들을 품은 채, 또 다른 내일을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