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석-면천 3.10학생독립만세운동기념관
김남석-면천 3.10학생독립만세운동기념관

<편집자주> 시민의창은 분야별 역량을 갖춘 당진 지역 전문가들이 참여해 각 분야의 영역을 심층 취재, 보도하는 코너입니다. 이번 코너는 김남석의 면천역사산책 다섯번째 '조선시대 말기 면천(沔川)을 기록하다'입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제작 보도합니다.

기록의 시대 조선

조선시대는 기록의 시대였다. 나라의 지존인 임금의 언행부터 철저히 살펴졌고 그 모습은 빠짐없이 기록되었다. 임금이 움직일 때마다 두 명의 사관이 따라다녔는데, 왼쪽 사관은 임금의 움직임을, 오른쪽 사관은 임금의 말을 기록하였다. 이를 ‘좌동우언(左動右言)’이라 하였는데, 매일매일의 기록물은 ‘사초(史草)’가 되어 후일 임금이 죽고 난 뒤에 작성되는‘실록(實錄)’의 자료가 되었다. 이같이 조선시대 임금은 기록에 포위되었고, 이 기록은 후일 정리되어 후손에게 전해졌기에 당대의 임금은 항상 사사로움이 없어야 했고, 공인(公人)으로서 언행에 조심하고 또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의 지배층인 사대부들도 말과 기록에 매우 엄격하였다. 관직에 나가서는 ‘언관(言官)’이나 ‘사관(史官)’이 되고자 하였고, 이들이 모인 ‘삼사(三司)에 들어가는 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알았다. 사대부 양반들이 영의정을 많이 배출한 가문보다 삼사의 관리를 많이 배출한 가문을 ’명문(名門)‘으로 간주하고 칭송한 것도 말과 기록, 즉 언행(言行)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사대부 양반들은 특히 기록에서 새로운 교훈을 얻는다는 사실을 항상 믿고 있었다. 현실 세계에서의 고단함을 극복할 수 있는 원동력을 예전의 기록에서 찾아냈기 때문이다. 사대부들은 특별히‘일기(日記)’를 씀으로써 스스로를 반성하였고, 통렬한 반성을 통하여 미래의 자기 발전을 모색하였다. 이들에게 있어서 일기는 자기 수양과 학문, 세상에 대한 관찰을 담은 ‘자기 성찰의 기록’이었다.

면천으로 유배온 김윤식, 바위에 새긴 마음

조선시대 말기의 외교가이며 사상가, 그리고 문장가인 김윤식(金允植, 1835~1922, 호:雲養)의 ‘의두암(依斗岩)’과 『면양행견일기(沔陽行遣日記)』는 19세기 말의 면천지역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아우르는 대표적인 기록물이다. 그는 고종시대의 대표적인 정치인으로, 1881년 영선사로 청에 파견되어 근대식 군사 기술을 배우기 위한 학도와 공장(工匠)을 이끌었다. 청나라에 체류하던 중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청군과 함께 귀국하였다. 이후 청과 일본, 러시아 등 열강의 각축 속에서 나라의 진로를 모색하였으나 정치적 갈등 끝에 면천(沔川)으로 유배되었다.

의두암
의두암

‘의두암(依斗岩)’은 김윤식이 영탑사 바위에 남긴 기록물이고, 『면양행견일기(沔陽行遣日記)』는 면천에서의 귀양 생활을 정리한 것이다. 원래 김윤식은 30세부터 죽기 직전까지 약 60년 동안 일기를 썼다고 하는데, 이때의 기록 중 남아 있는 것을 모아 『음청사(陰晴史, 흐린 날과 갠 날의 역사)』로 명명하였다. 그리고 『음청사』를 『음청사(1881 ~ 1883)』, 『속음청사(續陰晴史, 1887 ~ 1921)』’, 『추보음청사(追補陰晴史, 1883 ~ 1887)』 등 셋으로 구분하였다.

이중 ‘면양행견일기’는 1887년 5월 29일(도착:6월 5일)부터 1894년 6월 26일(출발:6월 29일)까지 7년 1개월간 유배 중의 기록이다. 여기서 ‘면양(沔陽)’은 면천의 다른 이름이고, ‘행견(行遣)’은 유배를 갔다는 의미다. 유배 장소는 영탑사에서 4년 정도이고, 1891년 8월 12일부터는 화정리(花井里, 영탑사 앞 마을)에서 살았다.

영탑사 7층석탑
영탑사 7층석탑

의두암은 면천면 성하리 영탑사 위에 있다. 즉 영탑사 7층 석탑에서 300m 정도 산책길을 오르다 보면 큰 바위가 있다. 바위의 생김새는 의자와 매우 흡사한 데, 의자의 등받이와 같은 면을 다듬어 ‘依斗岩’이라고 새겼다. 바위의 방향은 북동쪽에 있는 면천 읍성을 향하고 있고, 멀리는 아산만 건너 경기도와 서울을 향하고 있다. 의두암의 글자 하나의 크기는 가로 약 90㎝, 세로는 29㎝가량이고 바위 전체의 크기는 가로 420㎝, 높이 150㎝가량이다.

김윤식이 의두암을 만난 것은 유배 생활 1년째인 1888년 5월 18일이었다. 그는 지인들이 하룻밤을 자고 돌아가자 영탑사의 뒷산인 연화봉까지 올라가 이들을 전송하면서 부근에 있던 바위를 의두암이라 소개하였다. 즉 ‘연화봉의 좌측에 3층 석벽이 있는데 앉아서 멀리까지 바라볼 수 있다. 아미산(峨眉山)과 타불산(陀佛山) 사이에 있어 구름이 없으면 서울의 산과 강화의 마니산(磨尼山)이 다 눈에 들어온다’라고 하였다.

김윤식은 1888년 5월 22일에 특별히 ‘의두암기(依斗岩記)’를 썼다. 내용은 ‘상왕산의 산기슭이 남쪽으로 내려오면 활처럼 굽어 있다가 솟아오른 봉우리가 있는데 이를 연화봉(蓮花峯)이라고 한다. 봉을 따라 왼편으로 내려가면 3층으로 된 석벽이 있는데 각 층마다 몇 사람이 앉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1층을 진의강(振衣岡), 2층은 적취대(積翠臺), 3층은 의두암(依斗岩)이라 이름지었다’라고 말이다.

의두암 각자(刻字)
의두암 각자(刻字)

여기서 ‘진의(振衣)’는 ‘옷을 흔들어 세속의 먼지를 털어버리고 뜻을 고상하게 가진다’라는 의미다. ‘강(岡)’은 언덕 강으로 ‘세속의 먼지를 털어내는 언덕’을 뜻한다. 서울 우이동 계곡의 제4곡에 있는 진의강(振衣崗) 바위와 같은 이름이다. ‘적취대(積翠臺)’는 ‘푸른빛이 겹친 바위’라는 뜻이다. 역시 서울 우이동 계곡의 제2곡 ‘푸른 석벽이 서로 대치하여 병풍처럼 둘러싸인 큰 바위’라는 ‘적취병(積翠屛)’과 같은 의미다.

3층의 의두암(依斗岩)에 대하여 김윤식은 ‘나는 죄를 지어 남쪽으로 유배되어 영탑사에 임시로 거처하고 있으나 매양 한결같이 울적하고 무료하여 이 바위에 와서 앉아 우유 적적하게 북쪽을 바라보며 항상 임금님의 품 안에서 의지하고자 하는 생각이 있어서 ’의두‘라고 이름을 지었다’라고 하였다. 결국, ‘의두’의 뜻은 ‘북두(北斗=임금)에 의지한다’이고, 빨리 유배에서 석방되어 서울로 돌아가고자 하는 염원을 담고 있다.

진의강, 적취대, 의두암에 관한 설명은 김윤식이 지은 『면양행음집(沔陽行吟集, 운양집2, 연세대, 2013)』에 실린 ‘의두암(依斗岩)’이라는 시에도 잘 나타나 있다. 네 구절만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老石嶄巖立翠微(노석참암입취미, 푸른 산 중턱에 우뚝 솟은 바위), 嗒然相對俗塵稀(탑연상대속진희, 멍하니 바라봄에 속세의 먼지 없네), 心懸落日常依斗(심현낙일상의두, 지는 해에 매달린 마음 늘 북두성을 의지하고), 身御冷風欲振衣(신어냉풍욕진의, 시원한 바람 탄 몸 옷자락을 떨치려 하네)’등이다.

의두암 오르는 길
의두암 오르는 길

한편, 김윤식은 의두암 양쪽에 있는 바위에도 이름을 부여하였다. 위의 ‘의두암기(依斗岩記)’를 계속해서 보면 다음과 같다. ‘바위 양쪽 좌우에 큰 골이 우뚝 솟아 고개를 마주 보면서 두 손을 맞잡고 인사하며 보호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 좌측 바위를 구선암(癯仙巖)이라 하고, 오른쪽 바위를 두타암(頭陀巖)이라고 불렀다. 이는 다 그 형태가 비슷하여 이름 붙인 것이다. 동쪽으로 몽산(蒙山)이 바라다보이고 아래에 면양고성(沔陽古城)이 있으며 그 아래에 관아가 있는 마을이 있다. 군의 누각에서 나는 북과 나팔 소리와 절의 종소리가 서로 어울려 조화를 이룬다’라고 말이다.

‘구선암(癯仙岩)’은 ‘야위고 마른 듯한 신선 바위’라는 의미다. 길쭉하게 보이는 바위라서 구선암으로 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의두암의 우측에 있는 바위는 ‘두타암(頭陀岩)’으로, ‘속세의 번뇌를 버리고 불도 수행을 닦는다’라는 의미다. 김윤식은 바위의 생김새를 위주로 이름 지었다고 하였다.

동시에 그는 ‘이 산이 생긴 이래로 바위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왜 이름을 지어주지 않고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는가’라고 탄식하면서 ‘내가 이름을 지어주고 아름다운 경관을 기록으로 남긴다면 결국 바위의 행복이 아닐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름과 기록을 통해 바위에 생명을 심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석수(石手) 2명을 불러‘依斗岩’이라 바위에 새긴 것은 한 달쯤 지난 7월 초 4일이었고, 이 글씨는 지금까지 그대로 있다.

아미산 정상(유선암과 신선들의 바둑판은 어디에 있었을까)
아미산 정상(유선암과 신선들의 바둑판은 어디에 있었을까)

『면양행견일기(沔陽行遣日記)』에 담긴 19세기 면천

김윤식의 『면양행견일기(沔陽行遣日記)』에는 당대 면천지역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그는 그날그날 날씨와 일상생활뿐 아니라, 면천과 주변 지역 사람들의 만남과 교류, 면천군수를 비롯한 지방관과의 관계, 영탑사를 비롯한 주변 사찰의 모습, 내포지역의 명승과 환경, 면천의 풍속과 생활상, 효자의 효행문, 동학의 등장과 확산과정, 심지어 중앙 정계의 변동상황까지 상세히 기록하였다.

또한, 인근 지역인 죽동리 교동인씨의 족보 서문을 썼고 면천향교 흥학기를 지었으며, 각종 제문(祭文)도 작성하였다. 특히 농촌 생활의 공동체 조직인 두레를 소개하고, 농악의 활동 모습과 아울러 화정리(花井里)에서 새로 판 우물 주위로 돌을 쌓고 우물신에게 제사 지내는 제문은 매우 길고도 상세하다.

김윤식의 일기에는 아미산과 몽산, 다불산에 대한 등산 기록도 있다. 그는 우선 1890년 8월 초3일에 몽산과 아미산에 올랐다. 평소 그는 의두암에 올라 두 산을 바라보며 등산을 꿈꿨는데 드디어 실행에 옮긴 것이다. 그의 등산길에는 죽동리 인씨를 비롯한 많은 지인이 함께하였다. 이들이 몽산의 산등성이를 오르는데 깨진 자갈이 많았다. 사람들이 “옛날 성터입니다”라고 하였다. 몽산 산성을 넘은 것이다. 정상에 오르니 성황사(城隍祠)가 있었고, 읍내 사람들이 벌써 와서 굿할 떡과 과일을 놓고 무언가를 빌고 있었다고 한다. 현재 성황사는 없어졌고, 기우제 터만 남아 있다. 몽산은 면천군의 대표적인 기우제 장소였다.

몽산 정상의 기우제터(추정)
몽산 정상의 기우제터(추정)

아미산 등산도 이루어졌다. 몽산의 북쪽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오르는 코스다. 몽산보다 더 높고 가팔랐다. 자주 쉰 끝에 김윤식은 간신히 오를 수 있었다. 산 정상에는 유선암(遊仙巖)이라는 바위가 있었다. 바위 면이 갈라져 종횡으로 나 있는데, 사람들은 ‘신선들의 바둑판’이라고 하였다. 열 발짝을 더 오르니 정상이었다.

북쪽을 보니 관악산과 삼각산이 어렴풋하여 남쪽으로 온 지 4년 만에 한양의 산 경치를 보게 되었다며 김윤식은 감회에 젖었다. 산의 남쪽에는 송평(松坪), 다불(多佛), 금계(金鷄) 마을이 있고, 북쪽에는 죽동(竹洞), 백치(栢峙) 마을이 있는데 인씨와 이씨들이 대를 이어 살고 있다고 하였다. 다불산은 송평에 있다고 했는데 현재의 송학리를 지칭한다.

김윤식은 면천에서 실로 많은 인물과 교류하였다. 일기는 3~4일에 한 번씩은 썼고, 하루에 맞이하는 인물이 대략 5명 내외면, 적게 잡아도 1년에 500명 이상이 김윤식의 거처에 왔다. 이들은 이곳에서 김윤식과 시국을 논하고 나라를 걱정하였으며, 시와 글을 짓고 자문을 구하였다. 대표적인 방문객이 의금부도사를 지낸 안기원(安基遠, 호:方山)과 안정원(安鼎遠), 그리고 안종화(安鍾和)였다. 이들은 당시 홍주 땅인 고대리, 오곡리(현 당진시 송악읍)에 거주하고 있었다. 김윤식과 이들의 교분은 매우 두터웠고, 유배 중간에 김윤식이 한양을 다녀올 때도 이들의 저택에서 유숙하였고 한진항을 통해 나가고 들어왔다.

김윤식이 쓴 『운양집』권12, 「서후」(書後)에 보면, ‘제신라진흥왕북수대렵도(題新羅眞興王北狩大獵圖)’라는 글이 있다. 그가 1910년에 기록한 것이다.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은데, ‘김생의 글씨와 솔거의 그림은 모두 신선의 경지에 오른 것들이다. 솔거의 작품으로 보이는 신라 시대의 그림이 있는데 바로 진흥왕대수렵도이다. 6~700년경쯤 내려와 고려 충혜왕 때의 상신인 영대공(英垈公) 유청신(柳淸臣)의 손에 들어왔었다.

그 후 7~800년 동안 집안의 가보로 전하던 것을 내 벗인 안애석(安厓石) 정원(鼎遠)이 이 집안의 사위로서 그림을 얻었고 애석이 소장하다가 조카인 전비서승(前秘書丞) 안종화(安鍾和)가 이를 얻어 나에게 보여주었는데 8폭 병풍이었다. 그런데 해가 오래되어 때가 많고 손만 대도 떨어질 것같다. 그림은 약동적이고 거의 신묘하다. 사냥하는 그림이 선명하고 기상이 뛰어나다’라고 기록하였다. 안종화는 종2품 가선대부 출신으로, 『동사절요』, 『국조인물지』등을 저술한 한말의 국학자였다. 현재 도지정문화재로 지정된 오곡리의 송규섭가옥이 원래 안종화고택이다.

어린 유생의 스승이 된 김윤식

김윤식의 『면양행견일기(沔陽行遣日記)』에서 엿볼 수 있는 사실 가운데 마지막으로 들 수 있는 것이 어린 유생에 대한 끝없는 애정이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문종구, 박종열, 안인식 등이었다. 문종구에 관해서는 1887년 8월 초6일에, ‘동자 문추(文錘)가 충청감영에서 돌아왔다. 글재주가 충청도에서 떠들썩하게 드러나 가을 과거를 기대할 수 한다’라고 기록하였다. 문종구(文鍾龜, 호:수은)는 일명 ‘문추’로 불렸는데, 당진시 신평면 거산리 출신으로 당대 내포지역의 대표적인 학자였다. 문종구의 문집인 『수은집(睡隱集)』은 올해 당진문화원에서 번역집으로 발간 예정이다.

박종열도 면천의 유생으로 김윤식의 지도를 많이 받았다. 김윤식이 1889년 5월 12일에 쓴 ‘서증박종열(書贈朴琮烈)’에서 장문의 글을 통해 부모를 공경하고 어른을 섬기는 자세, 학문의 이치와 공부 방법에 대하여 고사성어와 선현의 사례를 들어 자상하게 지도하고 있다. ‘술은 끊기는 쉬워도 절제하는 것은 더 어렵다’라거나, ‘욕망을 끊기는 쉬워도 극복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라는 김윤식의 조언은 일반인에게도 와닿는 바 크다.

김윤식과 안인식(安寅植, 호:嵋山)에 관련한 기록은 안인식의 문집인 『미산문고』말미에 수록한 자서전에 있다. 그는 8세였던 1890년에 김윤식을 만났던 일을 회고하였다. ‘나는 선친을 따라 영탑사로 가서 운양 김상서(金尙書)를 뵈었다. 운양은 나에게 『효경』을 강론하게 하고, 이어 내가 외우고 있던 당시(唐詩) 몇 편을 암송하게 하였다. 김윤식은 이를 듣고 "기재(奇才)로다”라고 감탄하며 학문에 힘쓸 것을 당부하였다. 또한, 선친에게 내가 열두 살이 되면 직접 가르치겠다는 뜻까지 밝혔다. 하지만, 내가 열두 살이 되는 해는 갑오년이었고, 운양은 유배에서 풀려 서울로 돌아갔다’. 이 일화는 유배객 김윤식이 면천에서 단순히 시간만 보낸 것이 아니라 지역의 젊은 인재를 만나 학문을 격려하고 이끌었음을 보여준다.

조선은 기록을 중시한 나라였다. 임금의 언행부터 사대부의 일상에 이르기까지 기록하고 또 기록하였다. 그 기록은 한 시대의 경험과 기억을 다음 세대로 전해주는 힘이 되었다. 김윤식 역시 면천에서 보낸 유배의 세월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가 남긴 글 속에는 이름 없는 바위가 있고, 산과 들이 있었으며, 그곳에서 살다간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기록은 지나간 시간을 단순히 정리하는 일이지만, 잊힌 역사에 생명을 불어넣어 다시 태어나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김윤식의 『면양행견일기』가 오늘의 면천에 전해주는 가장 큰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