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정지의 봄
골정지의 봄

편집자 주 - 시민의창은 분야별 역량을 갖춘 당진지역 전문가들이 참여해 각 분야의 영역을 심층 취재, 보도하는 코너입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제작 보도합니다.

골정지는 당진시 면천면 성상리에 있다. 예전에는 골정지가 면천읍성 동문 밖에 있다 하여 ‘동문저수지’ 혹은 ‘동문 밖 저수지’라 하였고, 면천향교 아래 있어서 ‘향교지(鄕校池)’라고도 불렸다. 면적은 4필지에 11,369㎡(3,445평)이다. 4월에는 벚꽃이 만발하고, 8월에는 연꽃이 물 위를 가득 메우며, 가을에는 국화가 저수지를 감싼다. 사계절 경관이 수려하여 당진시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로 꼽힌다.

애당초 저수지가 축조된 시기는 고려말로 추정되나, 조선시대 전기에 제작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동국여지지에는 ‘벽골지(碧骨池)’혹은 ‘벽골제(碧骨提)’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다가 18세기경에 간행된 여지도서 면천군편에 보면 ‘골정제언(骨井堤堰)’으로 나오는데, 주위가 1,056척, 수심이 11척이라 하였다. 건축이나 토목에서 사용하는 조선시대 1척을 30.3㎝로 환산하면, 골정지의 둘레는 약 320m이고 깊이는 3.3m에 해당한다. 요즘, 골정지 데크길을 한 바퀴 돌면 610보 정도가 나오니 지금보다는 약간 컸을 듯하다.

초기 이름인 벽골제는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푸른 벽(壁)’과 ‘뼈 골(骨)’이니 ‘푸른 뼈대’로 이해되기도 하고, ‘골’을 ‘골짜기’에서 음차한 것으로 본다면, ‘푸른 골짜기의 둑(방죽)’으로 풀이되기도 한다. 골정지도 ‘뼈 골(骨)’과 ‘우물 정(井)’을 사용한 점으로 보아, ‘뼈대(방죽)와 우물’로 풀이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골짜기 우물’로 이해되기도 한다. 결국, ‘샘솟듯 나오는 물을 방죽에 모아 들판을 적신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겠다. 특히 성상리가 지형적으로 높은 편이고, 그중에서도 골정지가 가장 높은 지대임을 고려하면, 매우 적절하고 타당한 이름이다.

건곤일초정의 편액(현판)
건곤일초정의 편액(현판)

박지원 군수가 개축한 골정지와 건곤일초정

하지만, 골정지는 조선시대 후기 박지원 군수를 만나기 전까지 유명무실한 존재였다.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1797년(정조 21) 7월부터 1800년(순조 즉위년) 8월 양양 부사로 전근하기까지 약 3년 1개월간 면천 군수를 지냈다. 연암집(돌베개, 2007)에는 그가 골정지를 개축하는 과정을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즉, ‘군 성곽의 동쪽, 향교 앞에 둘레가 1,056척 되는 버려진 방죽이 있는데 둑 아래 물을 받아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스무 섬지기 남짓 된다. 그런데 해가 오래되어 메워지고 말 무덤이 옹기종기 있으며 가시덩굴이 무성하고 독충이 득실댔다. (경신년) 봄에 시원스레 파내 말 무덤을 모두 제거하고 물을 가두었다. 둑에는 버들을 심고 살구씨와 자두 씨를 뿌렸으며’라고 하였다. 경신년은 1800년이고, 축조의 목적은 논에 물을 대기 위함이었다. 한 섬지기를 열 마지기로 추정하면, 물을 공급받을 스무 섬지기는 대략 40,000평쯤 될 것이다. 현재 도량형으로는 132,000㎡이다.

한편, 건곤일초정(乾坤一草亭)도 박지원이 세운 것이다. 같은 책에서 박지원은 말하길, ‘저수지 가운데에 조그만 대(臺)를 쌓고 그 위에 초가지붕을 씌운 6면의 정자를 세웠다. 그리고 세 개의 수문이 난 긴 다리를 만들어 북쪽 둑에 연결 지었다’라고 하였다. 대의 형태는 알 수 없으나, 둥그런 대를 바탕으로 육모정을 지었으면, 이것은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우주관을 형상화한 것이다.

근대 이전의 세계인들은 하늘이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하늘과 땅 사이에 육각형이나 팔각형의 정자를 지어 사람과 소통하고자 하였다. 박지원도 이런 민본주의(民本主義) 세상을 꿈꾸었다. 물론, 다리를 면천향교 쪽으로 연결함으로써 향교를 출입하는 유생의 쉼터로 삼기도 하였다. ‘구조와 배치는 빈약하고 검소함을 벗어나지 못하였다’라고 박지원은 겸손해했지만, 지방 군수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골정지의 여름
골정지의 여름

건곤일초정에 담긴 연암의 철학과 의미

박지원은 정자의 명칭을 정함에 있어서도 많은 고민을 하였다. 하나는 ‘취옹정(醉翁亭)’이었다. ‘옛날 정자 이름을 지은 사람이 늙어 창백한 얼굴에 흰머리를 하고 술을 조금만 마셔도 문득 취한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중국 송나라의 문학가 구양수(歐陽脩, 1007~1072)의 취옹정기(醉翁亭記)에 나오는 말이다. 취옹은 구양수의 자(字)였다.

다른 하나는 ‘희우정(喜雨亭)’이다. 이는 ‘큰비가 사흘을 내리고 그쳤는데 나의 정자가 때마침 지어졌다’라는 뜻으로, 중국 송나라 소식(蘇軾, 1037~1101)의 희우정기(喜雨亭記)에 나오는 말이다. 그는 소동파로 잘 알려진 문장가였다. 그러나 박지원은 이 정자가 두 가지를 겸했다고 보고, ‘취옹희우우사정(醉翁喜雨又斯亭)’이라 정했다. 그리고 당시 충청도 관찰사인 김이영(金履永)에게 편액(현판) 글씨를 부탁했다. 하지만, 정자의 이름은 ‘건곤일초정’으로 정해졌다.

박지원의 아들인 박종채(朴宗采)가 지은 과정록(過庭錄, 나의 아버지 박지원, 돌베개, 1998)에 보면, 면천군수 재임 시절의 박지원에 관하여 상세한 설명이 실려 있다. 건곤일초정도 그중 하나인데, 원래 중국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 712~770)의 시에 나온다고 한다. 제목은 ‘모춘제양서신임초옥(暮春題瀼西新賃草屋)’인데, ‘늦은 봄, 양서의 새로 임대한 초가집에서 적다’라는 뜻이다. 이 시는 오언율시(五言律詩, 1행에 다섯 글자로 모두 8행으로 지은 시)인데, 그 한 구절이 ‘건곤일초정’이다. 의미는 ‘천하에 오로지 초가 한 칸이 남아있네’이다. 두보가 55세 되던 767년, ‘양서’라는 곳에서 살던 집이라 한다. 매우 검소하면서 누추했던 모양이다.

일찍이 홍대용(洪大容, 1731~1783)도 자신이 거주하던 집을 ‘건곤일초정’이라고 이름 지은 바 있었다. 홍대용은 서울 남산기슭에 정자를 짓고 박지원과 친밀했던 실학자들과 담론과 풍류를 즐겼다. 박지원(1737~1805)은 여섯 살 선배인 홍대용이 죽었을 때 제문을 지어줄 정도로 각별한 관계였는데, 홍대용의 ‘건곤일초정’도 박지원이 정자 이름을 짓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골정지에 핀 연꽃
골정지에 핀 연꽃

면천 군수 박지원의 애민 정책과 청렴

골정지와 건곤일초정에 관련된 이상의 내용에서 우리는 연암 박지원의 목가적이고 문학적이며, 어느 면에서는 풍류적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당대의 현실은 풍류를 즐길 만큼 녹록지 않았다. 18세기 말의 면천군 농민들은 커다란 내우외환(內憂外患)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홍수와 가뭄이 겹치는 재난이고, 또 하나는 서학(西學, 천주교)의 유입이었다. 정조(正祖)는 안의 현감(현 경남 함양군 안의면)을 마치고 한성으로 돌아온 박지원을 면천 군수로 직접 임명하였다. 61세의 노인이었지만, 박지원의 지혜를 믿은 것이다. 정사년인 1797년 여름, 박지원은 노구(老軀)를 이끌고 면천 군수로 부임하였다.

부임 첫날부터 박지원은 아전들에게 휘둘릴 뻔하였다. 아전들은 신임군수가 읍성 남문을 통해 들어오면 액운이 낀다고 거짓말하며 다른 길로 들어올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박지원은 아전에게 호통치며 정문(남문)으로 통과함으로써 신임군수의 의연한 결기를 드러냈다. 그리고 박지원은 면천 관아의 곳간인 창고부터 점검함으로써 군정(郡政)의 시작을 알렸다. 지방 행정의 기강을 바로잡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다음으로 백성을 살리는 일에 몰두하였다. 홍수와 가뭄을 단번에 해결하는 방법은 저수지 축조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골정지와 양제지(楊堤池)가 개축되었다. 특히 양제지는 주위 2,070척(627m), 수심 15척(4.5m)으로 골정지보다 규모가 컸다. 하지만, 비만 오면 제방이 붕괴하여 저수지 구실을 하지 못하였다. 그는 수문의 위치를 이동하고 새롭게 축조하였다. 이로써 양제지는 더욱 견고해졌고 더는 붕괴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 양제지는 순성면 양유리 남원천변에 있었는데, 원동저수지가 축조되면서 현재 논으로 바뀌었다.

또 한 가지는 천주교 문제였다. 천주교는 평등사상을 주장하여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를 무너뜨리는 역할을 하였고, 사후세계를 중시하는 내세관이 강했다. 이 때문에 조선의 지배층은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규정하고 철저한 탄압과 함께 금기시하였다. 그러나 내포의 천주교는 매우 강렬했고, 그중의 중심은 면천군 지역이었다. 더욱이 일반 주민은 재난의 원인을 천주교인에게 전가하여 주민 사이의 반목과 갈등은 더욱 심해져 있었다.

박지원은 천주교 신자에 시종 온화한 태도를 취했다. 그는 고문과 억압이 능사가 아니라고 믿었고, 정무가 끝난 밤늦도록 잡혀 온 천주교 신자를 달랬다. 대화를 통한 설득은 밤을 새웠고, 며칠을 지나도록 끝나지 않는 사례도 많았다. 신자가 마음속 깊이 반성하였다고 판단하고서야 박지원은 이들을 석방하였다. 백성을 지극히 존중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결과 신유년인 1801년의 대박해에서도 면천 군민 가운데 다친 사람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골정지의 겨울
골정지의 겨울

그 외에도 연암 박지원은 면천 군수로 재직하면서 많은 일을 하였다. 정조의 명을 받아 과농소초(課農小抄)와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 등 농서(農書)와 면양잡록(沔陽雜錄)을 저술한 것도 그중 하나였다. 중상주의 실학자로 잘 알려진 박지원은 이를 통해 토지제도 개혁과 농업기술 혁신을 주장하는 중농주의 실학자로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박지원의 애민정책은 흙벽돌 제작에서도 빛을 발했다. 그는 면천 군민의 주거환경을 개선키 위하여 흙벽돌을 다량으로 구워내게 했는데, 벽돌을 제작하는 거푸집에는 좋은 글귀를 새겨 백성을 스스로 깨우치게 하였다. 이로써 두메산골에 살면서 세상 물정 어두운 사람도 한문 몇 자는 알게 되었고, 글을 짓게 되었으며, 세상을 바라보고 읽어내는 눈과 마음을 갖게 되었다. 면천군에 인물이 많이 나는 이유이기도 했다.

박지원이 면천 군수로 바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안의현에서 사람이 왔다. 주민들이 송덕비를 세우겠다는 것이다. 이에 박지원은 서릿발 같은 호통으로 질책하고는 이들을 쫓아냈다. 박지원이 안의현을 떠나올 때 백발이 성성한 10여 명의 노인이 동구 밖까지 따라와 눈물로 전송했었다. 면천 군민도 안의현의 사례와 같이, 부귀와 위세를 탐하지 않는 박지원을 지극히 청렴하다고 칭송하였다.

골정지의 현대적 복원과 연암의 마음

그 후 골정지와 건곤일초정은 면천지역의 명물로 자리매김하였다. 면천향교의 유림은 공자를 제사하는 석전제(釋奠祭)가 끝나면 이곳에서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하였고, 골정지의 경관을 읊는 시문을 짓기도 하였다. 골정지의 제방에는 수령 200년 된 상수리나무가 있는데, 향교 유림이 잔치를 끝낸 후에 심은 기념수라고 전한다. 현재 마을 보호수 제406호로 지정되었다.

현재의 골정지로 가꿔진 것은 1999년 6월이었다. 이때 면천면은 자체 특수 시책사업으로 골정지를 정비하였고, 난무하던 대나무와 잡목을 베어내고 산책로를 개설하는 공원화 사업을 수행하였다. 2000년에는 면천면 죽동리 정토사에서 연 5뿌리를 얻어 저수지에 심었고, 2006년 3월 당진군(현 당진시)의 예산 투입으로 면천 관아 정문인 풍락루(豊樂樓)와 함께 일제히 정비하였다. 건곤일초정도 2006년 4월 착공하여 같은 해 6월에 복원하였다. 정자로 건너가는 다리도 당시 나무판으로 만든 뜬 다리였으나 견고한 돌다리로 바뀌었다. 한편, 건곤일초정의 편액(현판)과 안쪽의 충국효친(忠國孝親)은 유취성(兪聚星)이 썼다. 그는 면천면 성상 2리 출신이며 한학자로 알려져 있다.

박지원은 골정지와 건곤일초정을 조성하면서 ‘경물(景物)과 풍치(風致)는 옛사람에 뒤지지 않을 것이며, …… 호서(湖西)의 대단한 볼거리가 될 것이 틀림없을 터’라고 자신하였다. 현재의 골정지는 박지원이 예견한 바와 같이 많은 사람이 찾아와 계절과 함께 어우러지는 골정지의 풍광을 즐기고 있다. 드론으로 하늘에서 본 골정지가 ‘하트(Heart)’모양이라고 하는데, 관광객들은 골정지의 경관에 추가하여 연암 박지원의 백성 사랑하는 마음도 느끼고 갔으면 더할 나위 없겠다.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모습보다 숨겨져 있는 마음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문화재 설명과 각종 자료를 제공해 주신 고경수 전면천면장님과 김용관 전우체국장님께 감사드립니다.)

김남석(면천 3.10 학생독립만세운동기념관)
김남석(면천 3.10 학생독립만세운동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