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며…
현재에도 우리 지역의 역사가 곳곳에 남아 있다. 오래된 정자 하나, 이름 모를 비석 하나에도 사람의 손길과 시대의 흔적이 배어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문화재를 하나씩 찾아가며 그 안에 담긴 사람과 역사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제작·보도 됩니다.
1993년 5월 21일, 당진군(현 당진시)에서는 기록할 만한 중요 사안을 논의하고 있었다. 그것은 ‘군지정 향토유적’을 처음으로 정하는 일이었다. 이때 상정된 문화재는 ‘군자정’이었다. 군자정은 군자지 안에 있는데, 1959년 복진구(卜鎭俅)가 지은 것으로 당시로서는 불과 30여 년밖에 되지 않은 건물이었다.
전해오는 역사는 깊었다. ‘군자지’라는 연못은 고려 말기에 조성되었다고 하고, 군자정도 1803년에 처음 지어졌다는 기록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자는 조선시대 말기의 격변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주춧돌만 남을 정도로 쇠락한 것을 원래의 모습보다 축소된 육각정으로 다시 지었다.
회의에 참여한 유적보존위원들은 설왕설래하였다. 하지만, 많은 논의에도 불구하고 군자정은 ‘당진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되었다. 깊은 역사를 간직한 면천의 주변 환경과 함께 예의 바르고 덕이 충만한 지식인, 즉 ‘군자(君子)’의 상징적인 의미가 높이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새로 들어선 김영삼정부(1993~1998)는‘깨끗한 나라 만들기’를 국정 목표로 내세웠고, 환경 및 경관개선 사업을 중심으로 많은 예산을 투입하고 있었다. 이른바 ‘국토 가꾸기 사업’이었다. 당진군에서도 이 사업과 관련하여 군자지를 정비하고 군자정을 확장하여 새로 짓기로 하였다. 여기에는 1억 7000만원의 예산이 투입되었으며, 형태는 팔각정(높이 7.25m, 처마높이 3.6m, 건평 8.67평)으로 하였다.
논란은 심했다. 원래 모습인 육각정을 무시한 데 따른 것이었다. 이에 실무진은 육각정의 주춧돌을 없애지 않고 바닥재 밑에 묻어 흔적을 남기기로 하였다. 이로써 군자정은 당진 향토유적으로 지정된 불과 1년 만에 새로 지어지는 기묘한 사연을 안게 되었다. 좀 더 크고 화려한 새집으로, 군자정은 돌아왔다. 1994년의 일이다.

군자지(君子池)와 군자정(君子亭)은 면천면 성상리 778번지에 있다. 면천 객사인 조종관(朝宗館) 아래, 면천공립보통학교 3.10학생독립만세운동기념비가 서 있는 공원 바로 위쪽이다. 공원에는 역대 면천군수 송덕비가 있으며, 그 뒤에 군자지가 자리하고 있다.
조선 성종 때(1481년)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군자지’의 조성 경위가 잘 기록되어 있다. 한문을 풀어보면, ‘군자지는 객관(객사) 앞에 있는데 지군(知郡) 곽충룡(郭翀龍)이 만들었다. 연못 안에 연(蓮) 종자를 심고 염계(濂溪)의 설에 따라 이름을 지었다. 이제현이 칭찬하며 말하는데 ‘꽃과 열매가 더러운 물에도 물들지 아니하니 군자와 닮았다. 그래서 염계의 사랑을 받았다’라고 하였다. 염계(濂溪)는 주돈이(周敦, 1017~1073)의 호인데, 사람의 인성과 우주의 원리를 연구하여 성리학의 기초를 닦은 중국 북송의 유학자이다. 또한, 이제현(李齊賢, 1288~1367)은 고려말 공민왕 때의 대학자였다.
결국, 곽충룡은 공민왕(재위기간 1351~1374) 때 면주(沔州, 고려말 면천의 이름)의 행정책임자인 지군사(知郡事)로 부임하였고, 연못을 만들었다. 그리고 주돈이의 글을 따라 연못의 이름을 ‘군자지’라 한 것이다. 그는 이곳에 핀 연꽃을 바라보며 도덕적으로 이상적 인간상인 ‘군자(君子)’의 모습을 꿈꾸었다.
‘군자정’에 가려면 군자지 입구에서 네 개의 큰 돌을 이어 만든, 약간은 아찔한 다리(7.4m)를 건너야 한다. 그러면 둥근 원형의 인공섬에 오르게 되고, 군자정을 만나게 된다. 인공섬은 유한재(兪漢宰)가 만들었다. 그는 1802년부터 1804년까지 면천군수를 역임하였다. 공사는 1803년에 진행되었다. 그리고 19세기 세도정치의 부패와 민란기, 일제강점기를 보내며 군자정은 다시 쇠락하였다. 그후 복진구가 다시 세웠다는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다.
군자정의 편액(현판)은 한문으로 썼다. 글씨가 도톰하고 부드러운데 편액 자체는 다소 작은 편이다. 글쓴이는 조병호(趙炳鎬), 기해년(己亥年) 여름에 썼다고 하였다. 아마도 당진시 석문면 교로리에 사셨던 분이 아닌가 싶다. 평소 서예에 능했던 분이다. 면천공립보통학교 3.10학생독립만세운동기념관 전시실에 게시된 ‘독립선언서’도 이분이 썼는데, 매우 섬세하고 정제된 해서체를 보여준다. 기해년은 군자정을 재건하던 1959년에 해당한다. 60년이 넘은 편액이어서인지 매우 낡았다.

넓은 사각형의 군자지에 둥근 인공섬, 그리고 중앙에 들어선 팔각정자는 조선시대 전통사상을 표현하고 있다. 이는 ‘천원지방(天圓地方)’사상으로‘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라는 의미다. 하늘은 둥글게 움직이고, 인간이 사는 땅은 평평하게 고정되었다. 예전의 우주관인‘천동설(天動說)’과도 연결된다.
옛날, 땅(지구)은 우주의 중심이었다. 그리고 천체는 땅(지구)를 중심으로 돌았다. 땅(토지) 위에는 사람이 살았고, 결국 사람은 세상의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둥근 섬 위에 팔각정을 세웠다. ‘팔각’은 ‘동서남북’의 4개 방향과 그 사이 4개 방향을 더한 것으로 ‘세상의 모든 방향’을 뜻한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며 세상의 모든 방향으로 사람을 대한다는 의미다.
도형상으로 팔각은 원형과 사각형의 중간 형태로, 어느 면에서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신성한 도형으로 여겨졌다. 실제로 조선시대 팔각정은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서울 모화관 옆에 하나가 있었다고 한다. 그후 1897년 우리나라가 황제의 나라가 되면서 팔각정을 자유롭게 짓게 되었다. 이것은 하늘과 땅, 그리고 온 세상을 사람과 함께 하려는 ‘민본사상’으로 이어졌다.
군자정의 기둥도 모두 둥글다. 예전만 하여도, 둥근 기둥을 세운 곳은 궁궐과 사찰의 불전(佛殿)뿐이었다. 임금과 부처님은 지존의 위치에 있었기에 모든 기둥은 둥글었다. 하지만, 일반인의 주택이나 관공서의 건물은 모두 사각형의 기둥을 사용하였다. 둥근 기둥은 ‘하늘’을 상징했고 권위와 위엄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여기에도 ‘천원지방’사상이 적용된다. 특이한 건물은 일반 관공서 건물로 쓰인 ‘객사(客舍)’이다. 면천의 객사는 ‘조종관(朝宗館)’으로 불리는 곳인데, 이 건물의 기둥은 조선시대에도 둥글었다. 그 이유는 객사의 중앙에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가 모셔졌기 때문이다. 고을 수령이나 숙소를 사용하는 관원은 일정한 시기에 이곳에 절을 올리며 예를 다했다.
현대 들어서, 한옥이나 정자의 외곽 기둥은 대부분 원형이다. 그것은 전통적인 격식보다 현실적인 이유가 컸기 때문이다. 둥근 기둥은 지붕 하중을 고르게 분산시키고 균열을 최소화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대단히 안정적이고 효율적이다. 그래서인지 면천 객사인 조종관 위에 새롭게 짓고 있는 관아시설도 원형 기둥과 사각형 기둥을 혼용하고 있었다.
군자정은 최근에 지어서 그런지 단청(丹靑)도 선명하고 깨끗하다. 단청은 글자 그대로 ‘단’은 붉은색, ‘청’은 푸른색을 말한다. 원래 붉은 안료는 주사(朱砂), 푸른 안료는 동록(銅綠)을 썼다. 둘 다 독성이 있는 광물질이다. 주술적으로는 재앙을 막고 악귀를 물리친다는 ‘벽사(辟邪)’의 뜻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건물 안에 벌레가 끼지 못하게 하는 데 있었다.
과거에는 단청도 ‘전(殿)’, 즉 권위를 표현하는 궁전이나 불전에만 사용하였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는 공공의 목조건물 대부분에 사용한다. 그만큼 현대사회가 실용성을 중시하는 사회이기도 하지만, 전통적 위계가 하향 평준화된 때문도 있을 것이다.

한편, 인공섬 안 군자정 우측에는 ‘낭관호’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표지석 가운데에 낭관호(郎官湖)라고 한문으로 음각하고 오른쪽에 작은 글씨로 ‘李白命名之湖在沔州(이백명명지호재면주)’, 왼쪽에 ‘乙卯李健之(을묘이건지)’ 라고 새겨져 있다.
의미는 ‘이백이 면주에 있는 호수에 지은 이름’으로 ‘을묘년에 이건지가 세웠다’이다. ‘면주(沔州)’는 위에 쓴 바와 같이, 곽충룡이 군자지를 조성하던 시기의 이곳 지명이었다. 그런데 중국 당나라에도 면주가 있었다. 현재의 정확한 지명은 알 수 없으나, 중국 호북성 안에 있다고도 하고, 이백의 고향이라는 설도 있다.
그런데, 당나라 때 이백(李白, 이태백)이 이곳에서 장위(張謂), 면주목(沔州牧) 두공(杜公) 등 친구들과 더불어 뱃놀이를 즐겼다. 이때 장위가 호수의 이름을 새롭게 정해줄 것을 청하니, 이백이 술을 들어 호수에 부으며 ‘낭관호’라고 지어주었다. 이때부터 원래 이름인‘남호(南湖)’를 버리고 ‘낭관호(郎官湖)’가 되었다.
낭관호는 장위의 벼슬이 상서랑(尙書郞), 즉 중국 당나라 상서성의 낭관(郎官)이었기에 붙인 것으로 보인다. 이백이 지은 시가 있다. ‘郞官愛此水(낭관애차수) 因號郞官湖(인호낭관호)’. 이를 해석하면, ‘낭관이 이 호수를 사랑하니 그래서 낭관호라 이름하였다’이다.
한편, 표지석의 글씨는 이백이 직접 쓴 것인지, 아니면 이백의 글씨를 집자(集字) 한 것인지, 또는 표지석을 세운 이건지가 쓴 것인지 알 수 없다. 을묘년도 60갑자 중 하나인데 공민왕 재위기간 직후인 1375년으로 보이지만,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고, 이건지라는 인물도 분명히 확인되지 않는다.
군자정 내부의 천장에는 연못과 정자의 건립과정을 기록한 현판이 있다. 이를 종합하면, 군자지는 고려 말기인 1350년대에 곽충룡이 조성하였고, 인공섬과 군자정은 조선시대 말기인 1803년에 유한재가 지었다(완공은 이삼의가 했다고도 함). 이후 군자정은 허물어진 상태로 내려오다가 1959년 복진구가 다시 지었고 1988년 면천면장이던 인팔환이 못을 준설하고 안쪽에 석축을 하였다.
석축하면서 연못에는 연(蓮)을 다시 심어 여름이 되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1994년 군자정을 재건하면서 바닥에 자갈을 깔아 연꽃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현재 연꽃은 몇 송이만 필 뿐이다. 그리고 2011년 당진군에서 수문을 만들고 자갈도 더 깔아 옛날의 모습은 완전히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최근 새로운 장면은 인근 주민 한 분이 매일 아침 몇 년째 잉어 먹이를 주는 모습일 것이다. 이분의 정성으로 군자지에는 수많은 새로운 생명이 살찌워 가고 있다. 곽충룡과 유한재, 복진구와 인팔환 등 면천 고을의 행정가가 꿈꾼 ‘군자(君子)’의 세상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자신의 인격 함양’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는‘많은 사람과 소통하고 백성을 살찌우는 세상을 만드는 것’, 이것이 아닐까 싶다. (이글은 고경수 전 면천면장님과 함께 답사한 후에 쓴 것이다. 함께 해주신 면장님께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