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주>
당진전통시장이 전면 철거와 재건축이라는 새로운 변화를 맞았다. 그러나 재건축 이후 시장이 어떤 모습으로 운영될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여러 과제가 남아 있다. 이에 국내외 전통시장 재생 사례를 비교·분석해 당진전통시장 재건축이 향후 중소도시 전통시장 정책의 새로운 모델이 될 수 있을지를 총 6회에 걸쳐 짚어보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일본 나가하마시의 구로카베스퀘어를 찾아 매각 위기에 놓인 건물을 보존하고 주변 상권의 변화까지 이끈 과정을 살펴본다. 이를 통해 당진전통시장 재건축 이후 시장이 지역상권과 어떤 관계를 맺고, 지속적인 운영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짚어보고자 한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아 취재·보도합니다.

검은 벽의 광장을 뜻하는 구로카베스퀘어는 이름처럼 검은색의 건물과 상점거리가 이어진 공간이다. 오랜 시간 나가하마시의 경제 거점이었던 구로카베 건물은 민관 협력으로 보존되며 새로운 관광지로 거듭났다. 방문객의 발걸음은 주변 상점가와 원도심으로 이어졌고, 한 건물을 지키려는 사업은 상권 전체로 확산되는 낙수효과를 낳았다. 이곳이 지역의 관광·상업 공간으로 자리 잡기까지 어떤 고민과 선택이 있었을까. 지난달 21일 현지를 찾아 기타가와 가즈오 나가하마 히키야마문화협회 상무이사에게 구로카베스퀘어의 형성 과정과 그 배경을 들었다.

건물 매입 후 시작된 고민
구로카베스퀘어의 출발은 건물을 지키기 위한 ‘구로카베 프로젝트’에서 시작됐다. 약 150년 전 은행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1950년대에 들어 교회로 사용됐다. 그러나 나가하마의 인구가 줄면서 교회가 이전하고 건물은 매각될 위기에 놓였다. 공인중개사가 건물을 철거한 뒤 맨션을 지으려 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나가하마시와 지역 상공회의 상인들이 대응에 나섰다. 나가하마의 경제적 상징과도 같은 건물이었기 때문이다. 시와 민간은 1988년 12월 ‘주식회사 구로카베’를 설립하고 건물 매입을 추진했으며 최종적으로 민간기업이 9000만 엔, 나가하마시가 4000만 엔을 출자해 건물 매입에 성공했다.

하지만 건물을 사들이는 일이 우선이었던 만큼, 건물 활용 계획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았다. 임원들은 약 1년 동안 건물을 어떻게 활용할지 논의했다. 처음에는 지역 기업의 상품을 판매하는 산업회관으로 활용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나가하마 상권은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주변 지역을 아우를 만큼 번성했으나 80년대에 들어서 대형마트가 생기고 인구가 감소하면서 점차 침체했다. 이에 쇠퇴한 기존 산업의 상품을 판매하는 것만으로는 수익을 내기 어렵다는 판단이 나왔다.
다른 방안을 찾던 중 회사 대표가 유리공예를 제안했다. 당시 유리공예는 유럽에 비해 일본에서는 크게 발달하지 않은 분야였고 제대로 배워 시작한다면 새로운 산업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후 구로카베 주식회사는 연구와 준비를 거쳐 1989년 7월 유리공예관을 열었다.

협력보단 경쟁으로 성장해
구로카베 유리공예관은 나가하마의 기존 상점가 조합과 별도로 운영되고 있다. 유리공예관이 들어설 당시 주변 상인과 주민들의 반발이 컸다. 상인들은 두 달이면 망할 것이라며 사업의 지속가능성을 낮게 봤고, 옛 건물을 허물고 맨션을 짓는 게 상권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구로카베 유리공예관이 문을 연 뒤에도 상점가 조합과 마찰이 이어졌다. 구로카베스퀘어 인근에는 4개의 상점가가 있지만 어느 조합에도 가입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이에 대해 기타가와 상무이사는 “구로카베가 생각하는 소비층과 상점가의 소비층이 다르기 때문”이라며 “구로카베는 주로 교토, 오사카, 나고야 등에서 방문하는 일본인 관광객을 위주로 운영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구로카베가 점포를 늘리고 외부 방문객을 끌어들이면서 주변 상권에 변화가 나타났다. 구로카베를 찾은 사람들이 인근 상점가와 원도심으로 이동하면서 상권 전체에 손님이 유입된 것이다. 기타가와 상무이사는 “지역과 연계사업을 추진하기보다 구로카베만의 유리공예를 알리고 상품화하는 데만 집중했다”며 “협력보다 경쟁이 상권 활성화에 도움됐다”고 말했다. 이어 “구로카베 점포들이 외관과 상품의 질을 높이자 기존 상점들도 진열 방식과 상품을 바꾸며 손님을 끌어오기 위해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구로카베의 운영 방식을 당진에 그대로 옮길 수 없다. 그러나 협력이 항상 정답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당진 역시 각 점포와 상권이 경쟁력을 키우고, 한 곳에서 시작된 방문객의 발길이 주변으로 이어지는 구조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민간과 시의 역할 구분
구로카베 프로젝트는 나가하마시와 민간기업이 건물을 함께 매입하면서 시작됐지만 유리공예관 운영까지 함께하진 않았다. 나가하마시는 건물 매입에만 출자하고 추가적인 운영비를 지원하지 않았다. 구로카베 주식회사는 유리공예관을 운영하며 발생하는 건물 유지·보수와 인건비 등 비용을 자체적으로 마련해야 했고 이를 위해 주식회사 형태로 운영됐다.
기타가와 상무이사는 “민관 협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동 경영이 아니라 역할을 나누는 일”이라 말했다. 행정이 재정을 지원할 수 있지만 실제 경영에는 참여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는 “행정이 여러 단체의 요구를 모두 반영하려면 사업의 방향이 흐려지거나 책임이 불분명해질 수 있다”며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경영에 대한 책임은 민간이 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진전통시장은 공설시장이라는 점에서 구로카베와 운영 조건이 다르다. 시가 시장을 책임져야 하는 만큼 행정의 역할을 배제할 수는 없다. 다만 상품과 고객 유치는 개별 점포와 상인 조직이 담당할 필요가 있다. 구로카베 사례는 민관 협력에서 중요한 것이 민간과 시의 역할을 구분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연간 200만 명 방문에도 위기는 계속
구로카베는 유리공예관 1호점에서 시작해 점포를 30곳까지 늘리며 구로카베스퀘어로 영역을 넓혔다. 구로카베가 들어서기 전 나가하마 중심 상권은 전체 400개 점포 가운데 100여 개가 비어 있을 정도로 침체해 있었다. 그러나 유리공예를 중심으로 방문객이 늘면서 연간 약 200만 명이 찾는 지역의 관광·상업 거점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많은 방문객이 곧 안정적인 운영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기타가와 상무이사는 “30개 점포와 넓어진 시설을 유지·관리하는 데 상당한 비용이 들며 코로나19로 방문객이 줄면서 경영이 크게 흔들렸다”고 말했다. 이어 “현재 약 7억 엔의 채무가 있고 수익 대부분을 이자 상환에 써야 할 정도”라며 “은행에서 채무 일부를 면제해주고 새로운 법인 설립을 통해 재정 문제를 정리하고 있지만 운영 부담은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이는 상권 활성화가 곧바로 운영의 지속성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시설과 점포가 늘어날수록 관리비와 인건비 부담도 커지고 방문객이 줄어드는 시기에는 그 부담이 한꺼번에 드러날 수 있다. 당진전통시장도 재건축 이후 방문객 수나 행사 횟수만으로 성과를 판단하기보다 방문객의 실제 소비와 점포의 영업 지속성, 공공지원이 줄어든 뒤에도 시장이 운영될 수 있는지를 함께 따져야 한다.
구로카베가 당진에 보여준 것은 유리공예라는 특정 업종이 아니다. 철거 위기의 건물을 지킨 뒤 무엇을 담을지 고민하고, 행정과 민간의 역할을 나누며, 방문객을 끌어온 뒤에도 운영비와 부채라는 과제를 감당해야 했던 점이다. 당진전통시장 역시 새 건물을 짓는 데서 사업을 끝내지 않고 방문 이유를 만들고, 운영 주체와 책임을 명확히 하며 지속성을 만들어야 한다.

<구로카베스퀘어 취재후기>
“당진의 과거를 만나고 미래를 그리는 곳”
구로카베스퀘어를 방문했을 당시 유리공예관 건물 옆에 매달린 유리장식은 가을 햇살을 받아 반짝였고, 어두운 흑색 건물과 대비를 이루며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구로카베 관계자에게 들은 나가하마 상권의 쇠퇴 과정은 당진전통시장이 지나온 시간과 겹쳐 보였다. 한때 인근 지역까지 아우르던 나가하마 상권은 외곽 대형마트의 등장과 교통 발달, 인구 감소로 점차 쇠퇴했다. 당진전통시장 역시 변화한 소비 형태와 원도심의 침체 속에서 새로운 전환을 앞두고 있다. 지역의 규모와 사업 방식은 다르지만 기존 상권이 예전의 방식만으로는 활기를 되찾기 어려워졌다는 점에서 두 지역의 고민은 맞닿아 있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구로카베의 홍보 과정이었다. 유리공예관을 조성하는 데 대출까지 받아야 했던 탓에 별도의 홍보비가 없었다. 그러나 시와 민간기업이 힘을 모아 지역의 상징적인 건물을 보존하고 새로운 공간으로 활용하려 한 과정 자체가 주목받았다. 이후 일본의 공영방송인 NHK가 이 사업을 소개하면서 구로카베는 전국에 알려졌고 방문객 유입에 영향을 줬다. 거액의 홍보비보다 사업의 내용과 지역적 의미가 먼저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낸 셈이다.
당진전통시장도 대한민국 최초의 민간 주도 전통시장 현대화사업으로 전국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관심을 일회성 홍보에 그치게 하지 않는 일이다. 당진만의 시장 정체성과 재건축의 의미를 분명히 하고 사업이 끝난 뒤에도 사람들이 찾아올 이유를 만들어야 한다. 구로카베처럼 지역의 자원을 새로운 방식으로 연결한다면 지금의 관심이 시장 방문객 증가를 넘어 당진지역 상권의 변화로 이어지고 국내 전통시장 재생의 선도 사례로 나아가는 계기가 될 것이다.
구로카베에서 본 또 하나의 특징은 방문객의 모습이었다. 다른 일본 전통시장 거리에서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보였다면 구로카베에는 일본인 방문객이 눈에 띄었다. 관계자는 구로카베의 주요 소비층이 나가하마 주민이 아니라 교토·오사카·나고야 등에서 찾아오는 일본 국내 관광객이라고 설명했다.
그가 방문객을 끌어들이는 조건으로 꼽은 것은 화려함보다 “깔끔하면서도 편안한 시장 분위기”였다. 유리공예라는 분명한 볼거리를 갖추면서도 거리 자체는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도록 만든 점이 방문객을 끌어들인 이유로 보였다. 당진전통시장도 새 건물을 화려하게 꾸미는 데에 그치지 않고 지역의 정서가 느껴지고 시민들이 편하게 찾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으면 한다. 외부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힘과 지역 주민이 다시 찾는 편안함을 함께 갖출 때, 새 시장은 일회성 관광지가 아니라 생활 속 상권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