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이 사람에게 손과 발이 되어주고 싶었어요
벗처럼, 친구처럼 그렇게 이 사람의 동반자로 살고 있어요”
암흑속에서 파노라마처럼 스쳐가는 소리
이 글은 읽는 것이 아니라 들어야 한다. 그들은 이 글을 읽지 못할 것이기에. 자신들의 얘기를 쓴 이 글을 누군가로부터 전해듣거나 그도 아니면 어둠 속으로 조용히 묻힐 것이므로. 혹여, 누군가가 그들을 위해 그들의 얘기를 쓴 이 글을 순백의 백지에 오돌토돌한 점자로 찍어낸다면 그들이 자신들의 얘기를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눈이 아닌 손으로. 그렇게 손가락 끝으로 점자를 더듬거리며 한 자 한 자 읽어 내려갈지도.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이 글에 눈길을 주었다면 잠시 눈을 감고 눈앞의 암흑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그러할 것처럼 글이 내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암흑 속에서 파노라마처럼 스쳐가는 그 소리를……
그 내성적인 걸음걸이의 아름다움
손을 꼭 잡고 걸어가는 강윤식(54)씨와 박종분(46)씨. 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와 장승처럼 버티고 선 전봇대와 날카롭게 각진 벽과 어린애도 쉽게 뛰어내릴 수 있는 작은 턱들이 그들에겐 모두 장애물이다. 조심스럽게 머뭇거리며 한발씩 내딛지만 무엇인가 발 끝에 걸리면 휘청거리기도 하고 때로는 쓰러지기도 한다.
그러나 꼭 잡은 손은 어떤 일이 있어도 풀어지지 않는다. 그들의 내성적인 걸음걸이가 아름다워보이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한쪽이 넘어지면 다른 쪽이 일으켜주고 설령 둘이 동시에 넘어진다 해도 꼭 잡은 손으로 땅을 딛고 함께 일어선다. 정상인 사람들에게는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그들에겐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거리를 그들은 그렇게 꼭 붙어서 걸어간다.
새가 날아가는 소리는? 그리운 모습
그들 부부에게 세상은 빛이 아니다. 그저 막막한 암흑일 뿐이다. 그들은 심지어 자신의 얼굴 아니,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조차도 바라볼 수 없다. 웅숭깊은 암흑만이 끝없이 밀려오는 세상, 그들은 빛이 없는 어두운 외딴 섬에 살고 있다. 풀 한포기, 은빛 물살을 일렁이며 흘러가는 강물, 밤낮으로 수없이 뜨고 진 해와 달, 그 모든 것들이 어둠에 묻혀 있는 그런 섬에.
그들에게 무엇을 보았는가, 하고 물어보면 그들은 움푹 꺼진 자신의 눈을 쓸쓸히 만져본다. 저기 새가 날아간다고 한들 새를 본 적이 없는 그들이 새의 모습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들에게 소리는 세상을 느끼는 유일한 통로이다. 그들은 남들이 들을 수 없는 미세한 소리를 듣는다. 그 작은 울림들은 하나의 형체가 되어 그들의 어두운 눈앞에 가물거릴 것이다. 새가 날아가는 소리는? 그리운 모습. 강물이 흐르는 소리는? 안타까운 모습. 태양은? 힘찬 모습. 달은? 슬픈 모습. 함박눈은? 세상이 잠드는 모습. 꽃은? 눈이 떠지는 모습. 사랑은? 별이 반짝이는 모습…… 이렇게.
세상을 보는 마음의 눈
채운리에 위치한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충청남도지부 당진지회에서는 매주 목요일 오후 1시부터 2시간 동안 시각장애인들에게 점자를 교육하고 있다. 시각장애인들에게 점자를 가르치고 있는 박청정 강사 또한 앞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이다. 점판에 점관을 대고 점필로 점을 찍어가며 글자를 익히고 있는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이병환 회장이 더듬더듬 내 손을 잡아쥐며 말했다.
“저를 포함해 여기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앞을 볼 수 없어요. 그래서 점자교육을 시작했습니다. 나이가 많아서 학습속도가 느리긴 하지만 모두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기쁨이거든요. 시각장애인들은 육체적인 눈은 없습니다. 하지만 마음의 눈이 있죠. 그 눈으로 세상을 봅니다. 지금 제 앞에 있는 이기자님의 얼굴도 보여요.”
암흑과 희미한 빛이 만나……
지난 27일 이곳에서 강씨부부를 만났다. 둘다 중년의 나이지만 이들은 작년에 결혼한 신혼부부다.
다섯살 때 머리에 바른 약이 눈으로 스며들어 녹내장으로 실명한 강윤식씨는 1급장애인이고 당뇨병을 앓고 있는 박종분씨는 합병증으로 한쪽 눈을 실명하고 다른 쪽 눈마저 점점 시력을 잃어가고 있는 4급장애인이다. 박씨가 다니던 온양의 장애인사무실에서 둘의 만남을 주선하였고 작년 5월5일 송산면 당산리의 마을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저는 희미하게 앞을 볼 수 있어요. 깊은 밤, 먼 데 있는 불빛처럼 그렇게 보이죠.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이 사람에게 손과 발이 되어주고 싶었어요. 벗처럼, 친구처럼 그렇게 이 사람의 동반자로 살고 있어요.”
박씨는 먼 곳의 희미한 불빛으로나마 강씨의 암흑을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깜깜한 밤 그 희미한 빛에 기대어 길을 가는 것처럼 강씨는 박씨의 손을 꼭 붙들고 있었다.
늦깎이 신랑 신부지만 둘의 사랑은 여느 부부들만 못지 않다. 강씨 부부는 아직까지 부부싸움을 해본 적이 없다. 서로에게 무엇인가를 한사코 주려고만 할 뿐 바라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니 그럴 수밖에. 두분 중에 한 분이라도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좋을 것을…… 그러나 암흑과 희미한 빛이 만나 이루어진 사랑은 헤아릴 수 없이 깊게 느껴졌다.
마음으로 서로를 보는 그들
서로를 보려해도 자꾸만 엇나가는 그들의 시선. 혹, 정반대 방향을 향해 있다고 해도 그들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오르는 순간, 바로 그때에 그들은 서로를 보고 있는 것이다. 눈이 아닌 마음으로.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서로의 얼굴은 그렇게 암흑의 화면에 둥둥 떠다닐 것이었다.
“마음으로 상상하면 뭐든지 그려져유. 소리와 감각으로 느끼는 거쥬. 나를 장애인이라고 생각하는 마을 사람들은 한명도 없슈. 그래서 제작년에는 마을반장도 맡았다니께유. 뭘 해야 되겄다, 하고 집중하면 뭐든지 할 수가 있슈. 이 집도 내 손으로 직접 지은 걸유. 눈이 없는 저도 그런디…… 성한 사람은 정말로 축복받은 거예유.”
강씨는 작년에 석문간척지의 농지 32마지기를 얻어 농사도 지었다. 쌀을 판 돈으로 그동안 빚진 돈을 조금 갚았다고 했다. 정부에서 강씨 부부에게 보조금으로 지급해주는 돈은 한 달에 40만원 정도이다. 그 돈으로 모든 생활비뿐만 아니라 모시고 있는 노모에게 약도 사다드린다고 한다.
날이 조금만 더 따스해지면 강씨는 논으로 나갈 것이다. 그 사이 박씨는 새참을 준비해놓고 논둑길을 더듬거리며 걸어오는 강씨를 기다릴 것이다. 지난 겨울, 기름값이 없어 얼음장같은 방바닥에서 지냈다는 그들에게 따뜻한 봄날은 또 다른 커다란 기쁨일 것이다. 진정으로 축복받은 사람은 누구인지를 생각해본다. 축복받았으면서도 그걸 깨닫지 못했던 나일까? 아니면 축복 받지 못했어도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그들일까……?
■도움주실 분 :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충청남도지부 당진지회(전화 : 352-6660, 계좌번호 : 농협 481010-51-040303 한시연당진)
이희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