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 ‘상록수’는 농촌계몽소설이면서 연애소설이기도 하다. 학교교육을 통하여 우리는 소설 속의 주인공 박동혁과 채영신의 실제 모델이 있음을 40여 년이 넘도록 배워오고 그러한 정신은 시대적으로 새마을운동과 연결이 되었으며 흔히 ‘인간 상록수’, ‘상록수 공무원’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면서 한 시대를 이끌어오기까지 했고, 현재에도 그건 진행형이다. 오죽하면 우리나라에서 외국으로 파병하는 군대 이름에까지도 ‘상록수부대’라 불러지고 있으니.(이건 아주 변질된 한 모습이 아닐려나?) 장강 같은 시대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도 그 ‘푸르른 정신’은 도도하게 살아 나와서 이제는 어감에서조차 변질된 야릇한 아이러니를 자아내게 만든다.(이 부분에 대한 건 따로 준비해, 자료와 함께 긴 글을 썼는데 채우고 혹은 다듬느라 매만지고 있다) 문학평론가 김윤식의 말을 빌리면 우리 시대의 교과서란 ‘글자 그대로 표준적인 것, 규격에 맞는 것, 모델을 가리킨다. 교과서는 국어를 몸뚱이로 하고 있는 만큼 어떤 심리나 정서 또는 이를 떠나면 유령이 된다’고 간파하고 사람은 그것을 통해 공부하고 그것은 곧 경험이며, 공부란 이념, 혹은 개념으로 사고함을 두고 공부라 한단다. 다른 이름으로는 ‘학문’이란 어려운 말을 쓰는 것이고. 이젠 학문은 고답적인 틀을 깨고 대중들의 지적인 호기심을 즐겁게 하는, 그 일이 어렵다 해도 나름의 세계를 건축해 가는 모든 이들의 인문학으로 거듭나야 한다. 철옹성의 녹슬은 빗장을 그 언제까지나 지키고 있으려는지(썩어빠진 권위주의는 틀을 터서 대중적 즐거움을 주는 인문학이 절실하다). 그래서 안타깝다. 가톨릭대 류양선 교수는 2001년 심훈 외에 5인의 탄생 100주년을 맞은 문인 특집으로 월간 문학사상에서 기획했던 9월호에 ‘광복을 선취한 늘푸른 빛- 심훈의 생애와 문학 재조명’을 통해 사회주의보다는 비타협적인 민족주의 쪽에 기울었던 그의 작품세계를 논하였다. 그는 동아출판사의 한국소설문학대계 21권인 심훈편에도 ‘좌우익 한계 넘은 독자적 농민문학’이란 평론을 싣고 있기도 하다. 심훈의 소설 “상록수”는 지금껏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다양한 방법으로 연구되어 왔다. 이광수의 “흙”이나 이기영의 “고향”과도 구별이 되는 의의를 지니면서 ‘브나로드’의 정신을 밑자락에 갈고 헌신적인 계몽운동이 결합된 것이라고!
들 한다. 그러면서 이 소설은 당시 농민들의 생활상을 다 드러낸 소설도 아니고, 농촌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정면으로 육박해 들어간 소설도 아니라는 것이다. 류교수는 여태서 심훈론이나 ‘상록수’세계를 파악하고자 그에 대한 평론이 많다. 그가 당진에 왔던 올해 2월에 (현재까지 두 번이나 왔었고 연구하는 작업이 끝날 때까지는 계속 내려올 것이라 한다) 나에게 건내준 논문 발표집에는 최근에 아주대학교에서 발표한 ‘상록수 모델론- 상록수로 살아있는 사랑의 여인상’이 수록되어 있었다. 중심은 여주인공인 채영신의 모델인 최용신의 흐름으로 된 것이었지만, 당진에 답사 오는 이유중의 하나가 남주인공인 박동혁에 대한 모델론을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읽은 그 ‘상록수 모델론’에는 남녀주인공 중 흔히 알려진, 이곳에서 공동경작회를 조직한 심훈의 조카 심재영이 박동혁의 모델로 보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어, 이에 대한 세밀한 조사 연구가 필요하다고 피력하고 있다. 그날 홍석표씨(현 내포향토문화연구원장)와 이야기가 오고 가 두 분은 현지답사까지 한 다음에 류교수는 서울로 돌아갔다. 많은 부분이 선행적인 연구가 이뤄져야 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의 현재적인 삶도 한 줄기의 역사로 구성이 된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거니와, 지난날 현대사에는 아직도 개인의 아픈 상처와 암흑의 질곡들이 무수하게 가려진 채 제대로 모습을 드러내길 꺼리고 있다. 근현대사의 이면에는 그렇게 감추어진 개인사 곡절들이 무슨 회한처럼 은밀하게 오늘도 숨쉬고 있는 것이다. 한국사회 저변에는 그런 몹쓸 병들이 도처에 곰팡이처럼 피어있다. 그날, 아주 오래 전의 신문 기사(조선일보 62년 5월 18일, 7월 26일자)를 꺼내보았다. 제목은 ‘다시 움튼 상록수의 얼-심훈의 상록학원 30년만에 문열어’와 ‘푸른 꿈 부푸는 상록수 마을-소설의 주인공 심재영씨 재기’였다. 군사 쿠데타 직후 61년 6월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직속으로 재건국민운동본부를 각 시·도, 각 읍·면·동과 리 단위에 이르기까지 조직해 전국적인 계몽운동과 향토개발사업을 벌이기 시작했다.(1대 본부장-유진오, 2대 본부장-유달영씨였다.)
물론 사실이지만, 예전의 왜곡된 사실은 외면할수록 거짓된 역사만을 우리에게 물려준다는 것-제대로 된 “상록수” 모델론이 나올 때를 기다린다.
(다음회-심우섭과 춘원 이광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