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맥히지 나 살아온거 말하자면...”

송악면 청금리 과수원이 많은 이 마을에서 칠십평생을 살아온 장영진 할머니의 인생 넋두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춘기석전제가 열린 날 촉촉한 봄비가 내리는 속에서 당진향교 유림들이 수여하는 장한 어머니상을 받고 장할머니는 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스물하나에 혼자돼 외아들과 조카 넷까지 거둬 키우며 살아온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장영진 할머니. 이름도 없이 ‘언년이’로 살다가 남동생과 같은 음의 이름을 쓰게된 할머니는 살아온 얘기만 할라치면 늘 말보다 눈물이 앞설만큼 기구한 삶을 살아왔다.

할머니는 청금리에서 나 열여섯에 같은 마을로 시집을 왔다. 집한칸 변변치 않던 가난한 시집이었는데 6.25때 남편과 두살난 딸, 큰시아주버니 내외, 작은 시아주버니, 시아버님을 한꺼번에 잃는 참사를 겪었다. 남편은 인공때 실종됐고, 어린딸과 시댁식구들은 장티푸스 때문이었다.

그때 나이 스물한살. 외아들이 다섯살이었다. 하루아침에 고아가 된 큰 조카 넷과 시어머니, 이렇게 여섯식구를 부양해야 할 무거운 짐을 지게 된것이다.

슬픔에 잠길 겨를도 없이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밥구걸 하지 않고 살겠다는 각오로 슬픔을 삼켜야 했고, 땅 한뙤기 없어 곧 행상에 나섰다. 동네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일부러 외곽으로 돌아다니며 엿 팔고 굴사다 되팔기를 15년간 했다.

나무도 해다 팔았다. 신평장날에 하루 네번씩이나 그 먼길을 오가며 나무를 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열흘 아침 저녁을 죽으로 떼웠던 적도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득해질 뿐이다.

친정어머니가 송아지 한마리를 준게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됐다. 이태를 키워 내다 파니 쌀 7가마가 들어왔고 그것으로 논 두마지기를 샀다. 그 이듬해에 또 두마지기를 사고 이렇게 열마지기를 사놓고 보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러면서 조카들의 혼례를 치러주고 한번도 자신의 말을 거역해 본적 없는 착한 아들도 아내를 맞게 되었다.

함께 힘을 모아 ,3천평의 과수원을 산것은 20여년전쯤이다. 구걸하지 않고 살겠다던 다짐이 이렇게 큰 일을 해낸 것이다.

지난해 할머니는 미루고 미뤄왔던 남편의 장례를 치렀다. 행혀 어딘가에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을 반세기가 지나서야 포기한 것이다.

“다 팔자려니 하고 살았지 누굴 원망할 건덕지도 없었으니까...”

일이 몸에 밴 까닭에 아직도 하루 2만원벌이 양계장 일하는 ‘또순이’ 장영진 할머니. 할머니의 바램은 아픈 곳 없이 건강히 살다가 남편 곁으로 가 쌓였던 회포를 푸는 것이란다.

/이명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