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들에 세월이 여무는 소리가 가득하다.
알알이 여문 밤톨이 세상구경하러 고개를 내밀고 빠알간 고추 잠자리는 파란 하늘을 이고 빙빙돌며 춤을 춘다.
세찬 비바람을 이긴 자연은 마음 뿌듯한 풍요로움을 선물로 준다.
누릿누릿 익어가는 들녘을 바라보며 감사한 마음에 세상의 온갖 시름이 잦아든다. 이 순간 만은 쌀값이니 기름값이니 세금이 어떻고 하는 등의 소리는 접어 놓고 싶다. 어느새 추석 명절이 지났다.
내 핏줄따라 모여 앉아 오손도손 세상이야기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세상이 온통 집 안으로 들어와 버린 듯 시끌벅적하다. 음식장만, 조상님 접대, 식사준비, 술시중, 끝없이 이어지는 부엌일이 많기도 하다.
오죽하면 여성들이 명절이 아니라 고생절이라고 부를까. 그래도 젊은 세대는 남편들에게 거들어 달라고 투정이라도 하지만 우리 쉰세대는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당연히 해야 하는 일로 받아들이며 살아왔다.
조상님 덕에 일찍 태어나 아들로, 가장으로, 아버지로 대접받으며 살아온 세대요 세월 덕에 남편들의 외조로 간편해진 제수 준비로 명절을 즐기는 세대가 공존하는 세상이다. 세상이 변해서 명절에 식솔들을 데리고 콘도나 호텔로 가서 맞춤제수로 차례지내는 것이 흔한 모습이 되었다. 허기사 상당히 보수적인 나도 백년손님인 사위가 설거지 한다고 나서는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편하고 좋았다. 세상이 변한 만큼 변하면 좋은 것을... 자유분방한 젊은 세대와 나이드신 어르신 세대 사이에 끼여있는 우리네 쉰세대는 젊은 세대의 자유로운 생각과 행동이 부러우면서도 자라면서 길들여진 고정관념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 한다.
세상이 변하면 생각도 같이 변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부딪히고 깨지면서 상처를 받는다.
세계화와 유비쿼터스 다 부담스럽다. 순리대로 살아왔다고 자부하지만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에서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나는 이 시대의 주역으로 나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가끔 반문해 보지만 답이 나오지 않는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난 내가 살아온 방식대로 그냥 그렇게 살아 갈 수 밖에 없음을 안다.
오늘도, 내일도, 그저 가끔 내 생각들을 나들이 시키면서 말이다. 남들보다는 더디게 변하면서 살아온 모습 그대로 그렇게 살아 갈 것이다.
가을이 가져다 주는 넉넉한 모습에 세월이 지나감을 눈으로는 보는데. 마음은 저 자리에 그냥 그렇게 서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