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서 피가 다 빠지며 아주 희미하게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피 주사를 5병 맞고 난 뒤부터 정신이 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고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편케만 살려고 하지 말고 일거리를 찾았으면 좋겠어요. 만원을 썼다고 해도 천원마저 안 벌면 그 천원도 없는 것입니다.”

“그 당시 섬에서 먹고 산다는 건 징역생활과도 같았어요.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고 여름철의 경우 생산되는 것이 없었으니까요.”

뭍에서 5분 안에 대조도가 있다

당진에서 30여분을 내달려 도착한 도비도 휴양단지 선착장. 그곳에서 정면을 바라보면 대조도가 보인다.

‘과연 저곳에 사람들이 살까’라는 의문이 들 때쯤, 보일 듯 말 듯 한두 채의 가옥들이 눈에 들어온다.

‘사람이 살겠구나!’ 싶어질 때 두둥실 떠있는 배 위에서 손을 흔드는 한 남자, 바로 이상억(59, 석문면 난지도리)씨다.

이씨의 복만호가 파도를 가르는 동안 대조도는 점점 가까워졌다. 보일 듯 말듯했던 가옥들이 점점 커보이기 시작하고 그렇게 5분이 흐르자 대조도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바다가 훤히 내다보이는 들마루와 여기저기 널려져 있는 그물들.

작다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대조도 선착장 입구에는 서너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각각 다른 집인지 의심될 정도로 오픈된 상태여서 마치 한 가족이 사는 것처럼 느껴졌다.

불편한 몸에도 섬을 삶의 터전으로

이씨가 이곳 대조도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대호·석문방조제가 건설되기 전인 지금으로부터 36년 전이다.

월남전에 참전했다 대인지뢰(크레모아)에 한쪽 다리를 잃은 뒤에야 출산한 아내(이세옥,57)와 만날 수 있었던 이씨는 치료를 위해 수개월 동안 국군병원에 머물렀다.

그러나 그 기간동안 치료만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불편한 몸으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개조’돼야 한다면서 같은 상이군인에게 혹독한 신고식을 치러야 했다.

“여기서 꾀를 부리지 않으면 죽겠다 싶었어요. 실제로 죽는 환자들도 있었어요.”

사고당시의 상황은 더욱 처참했다.

9명으로 구성된 이씨의 부대가 지역정찰을 벌이던 오후 3시경, 크레모아가 폭발하면서 일대는 아비규환으로 바뀌었다. 부상당한 대원들이 저마다 고통을 호소하고 이들을 후송하기 위해 온 아군의 헬리콥터에서는 ‘소리 지르지 말라’는 방송을 내보냈다. 적에게 노출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몸에서 피가 다 빠지며 아주 희미하게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피 주사를 5병 맞고 난 뒤부터 정신이 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고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같은 일을 겪은 이씨는 그래도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보통 부대가 지뢰 등에 노출되면 전체가 목숨을 잃게 될 확률이 높지만 이씨 부대의 경우 3명이 죽고 6명이 부상했다는 것이다.

이씨의 시련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치료를 마치고 가족 곁으로 돌아온 순간 이씨는 세상과 다시 싸워야 했다.

아내 이세옥씨는 다리를 잃은 채 복귀한 남편의 모습을 봤을 때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했다.

“남편이 스물한살, 제가 열아홉살 때 결혼하고서 하룻밤을 보낸 뒤 군대에 갔어요. 시누이에게서 남편이 조금 다쳤다는 얘기를 들었죠. 비가 억수같이 오는 날, 다리 한쪽이 허전한 채 목발을 짚고 서있는 남편의 모습을 봤을 때 눈앞이 캄캄할 뿐이었죠.”

이세옥씨는 다음 이야기를 잇지 못한 채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고통의 시간을 보낸 뒤의 허탈함이었다.

그래도 아내 이세옥씨는 남편을 떠나겠다는 생각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시집식구들과 함께 살았고, 아들 이정우(38)씨가 있었기 때문이다.

쉽지 않았던 섬에서의 삶

이후 이씨는 인천의 한 여객회사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삶은 술에 찌든 삶이었다. 그래서 택한 것이 바로 대조도행이었다.

계획대로 술과 완전히 멀어지지는 못했지만 섬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술을 마시는 횟수도 점차 줄었다. 무엇보다 생계를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내다 팔아야 했다.

“기계배들이 없을 때였습니다. 노젓는 ‘땟마(배)’를 대산면 돗구시(대조도에서 서산쪽으로 보이는 육지)에서 빌려왔죠. 겨울에는 굴을, 나머지 계절에는 바지락을 내다 팔았습니다. 그러나 쉽지 않았죠. 해창(고대면)으로 올라가는 물길이 너무 세서 아침에 가면 오후에나 도착했고, 교로리에서 당진으로 가는 버스는 하루 두번, 삼길포에서는 3번 있었을 때니까 시간을 못맞춰 제값 받기가 힘들었어요. 싱싱하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대조도를 떠났다. 또 정부에서도 3세대 이하가 거주하는 취약지구(간첩출현지역)에는 거주민들을 이주시키는 정책을 폈다. 그래서 잠시 뭍에 나가 살기도 했다는 이씨는 대조도에 사람이 살 수 있도록 갖은 노력을 했다고 말했다.

“그 당시 섬에서 먹고 산다는 건 징역생활과도 같았어요.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고 여름철의 경우 생산되는 것이 없었으니까요. 적응 못하고 나간 사람들도 많은데 끝까지 살아보자 마음먹었고, 대호방조제가 생기고 기계배들이 들여오면서 사람들이 하나 둘 드나들기 시작했죠. 그리고 이렇게 지금까지 살고 있어요.”

섬 - 삶의 터전이자 도전의 대상

비바람이 불 때면 섬은 심란하다.

높은 파도에 배가 들썩이고, 파도가 제방에 부딪쳐 섬의 안쪽까지 들어오기 일쑤다. 그러나 36년 전에 비교하면 지금의 대조도는 ‘바다 가운데 도시’라는 것이 이씨의 설명이다.

섬이라 해도 육지와 거의 같다는 것이다. 다만 그 시절에 비해 물고기들이 현저히 줄어든 것이 변화라면 변화다.

“젊은이들에게 섬은 놀러가는 곳일지 모르지만 나에게 섬은 삶의 터전이자 개척의 대상입니다. 개천이든 섬이든 그 다른 어떤 곳이 됐든 노력의 대가는 주어지기 마련입니다. 편케만 살려고 하지 말고 일거리를 찾았으면 좋겠어요. 만원을 썼다고 해도 천원마저 안 벌면 그 천원도 없는 것이니까요.”

“집사람과 의자에 앉아서 잔잔한 바다위에 오색 빛을 보고 있노라면 그렇게 좋을 수 없어요. 돈이 아무리 많아도 이런 풍경과 함께 살기는 쉽지 않으니까요. 제가 사는 이곳이 바로 세상의 중심입니다.”

석양이 지고 어둠이 짙어질 무렵 이씨의 복만호를 타고 뭍으로 향했다.

복만호의 모터소리 뒤에 하얀 파도가 뒤따르고 그 너머에서 대조도가 안녕을 고하고 있었다.

대조도는 그렇게 어둠속으로 서서히 멀어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