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5학년 정월 대보름날이였다.
달은 휘영청 밝은데 부엌에서 달그락 소리가 났다.
어머니는 “동네 형들이 밥 훔쳐 먹느라고 그러니 너도 나가서 같이 다녀라"라고 했다. 그날 동네 형들과 쥐불놀이 하면서 훔친 밥은 양은 양동이에 넣어 비비고 국은 짚을 태워 데워서 배를 불리고 실컷 놀던 추억이 있다.
가난했던 그 시절 아이들을 위해서 따로 잘(?) 훔쳐가서 먹을 수 있게 준비해둔 계성동 어르신들의 사랑의 마음을 지금도 나는 잊을 수 없다.
올해 여성문화제행사날 저녁 때 불꽃놀이도 하고 싶고 야외 영상제도 하고 싶은데 문화제 참가 여성들이 대부분 주부들이고 가족들 저녁식사를 준비하여야 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나는 비빔밥을 해먹자고 제안하게 되었다.
주부들이 여성들의 축제인 여성문화제가 끝나기도 전에 공연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장을 봐서 무얼 해먹지 하는 고민을 하여야 한다는 것은 비극이다.
문화제가 여성들의 문화적인 해방공간이라면 우리는 여성들에게 한끼의 고민으로부터 해방을 선물하여야 했다.
그 옛날 대보름, 훔쳐갈 밥을 준비하신 어른들의 사랑의 배려처럼.
마실을 가서 점심 때를 넘긴 주부들이 모여 커다란 양푼에 남은 반찬 이것저것넣고 비벼서 수저만 꽂아 함께 먹곤 하는 양푼 비빔밥은 한끼를 해결함과 동시에 설겆이의 간편과 냉장고 정리를 생각한 주부들만의 이심전심의 결과이다. 그렇듯 양푼 비빔밥은 단순한 한끼가 아니라 주부간의 사랑과 배려의 의미가 있다.
그런데 그 비빔밥을 남자들이 만들어 제공한다면 어떨까?
사랑과 배려가 있고 대접의 의미까지 더해진, 거기에 배식의 편리함까지 갖춘 최상의 메뉴가 아닐 수 없다.
당일 9시부터 군청 구내식당 주방에 모인 우리 9명의 비빔밥 전사들은 서툰(?) 솜씨로 엄청난 양의 나물들과 계란 지단과 씨름을 하였고 결국 완성된 음식을 배식을 맡은 당진청년연합회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살다보니 남자가 만들어주는 음식을 다 먹어보네... 여자들이 다 만들고 퍼주기만 하는거죠."
어둑어둑해지는 가운데 가로등이 하나둘씩 켜지고 1000여명의 사람들이 ‘당진문예의 전당’ 잔디밭 여기저기에 옹기종기 모여서 다함께 식사를 하는 모습은 어릴 적 다함께 쥐불놀이를 하면서 먹던 그 비빔밥이 주는, 서로를 배려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다시 보여주는 장관 그 자체였다.
후원해준 현대제철과 자원봉사단, 엄청난 양의 비빔밥을 비벼서 1100여명의 가족에게 나누어주느라 고생한 청년연합회회원 여러분, 그리고 끝까지 함께 봉사하느라 탈진상태까지 이른 민종기 군수에게 지면을 빌어 감사함을 전한다.
활기찬 BGM을 불러준 남성 보컬에게도 감사하고 무엇보다도 함께 기꺼이 음식 만들기에 동참한 9명의 비빔밥 전사, 당진참여연대 남성회원과 당진시대 직원 여러분에게도 감사드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