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밤, 나는 아버지의 모습이 흐릿하게 찍힌 한 장의 사진을 응시한다. 서른 여섯, 이른 나이에 죽은 아버지. 아버지는 출구가 없는 방 같은 사람이었다. 그 무엇도 받아들일 수 없고, 마찬가지로 그 무엇도 내보낼 수 없는.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고, 나 또한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다. 어릴 적 나는 허약하고 자폐적인 성향을 지닌 아이였으며, 아버지는 ‘모자란 것…’ 내 정수리에 한 마디를 쏟아부은 후 나를 집밖으로 내쫓곤 했다. 아버지가 나를 학대했던 이유를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아버지의 오래된 사진을 내려다보며 내 존재가 커다란 눈물방울 같다는 생각을 하고, 일종의 어떤 가혹한 감정에 휩싸인다.
아버지를 추억하는 내게 불임치료를 받았지만 끝내 임신하지 못한 아내의 상상임신 소식이 전해진다. 이미 두 번이나 상상임신을 겪고 3년이 지났으므로 나는 아내가 임신을 체념한 것이리라 믿었다. 아내는 내게 세 번째 상상임신을 했다는 걸 숨기고 친구가 운영하는 화실에 다니기 시작한다. 나는 아내가 없는 텅 빈 집에서 아내가 겪었을 슬픔과 체념, 아이를 갖지 못하는 여자로서의 무력함을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는 친구의 화실에 머무르겠다는 메모를 남기고 집을 나간다.
아버지는 조부의 두 번째 부인(할머니)에게서 태어난 첫 번째 아들이었다. 조부의 첫 번째 부인(분임기 할머니)은 아들을 낳지 못했으며,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 두 번째 부인을 얻은 것이다. 분임기 할머니는 4명의 고모를 낳았을 뿐이고, 어떤 운명에 얽혀든 듯 그 동안 할머니는 5명의 아들을 낳게 된다. 그렇게 해서 9명의 거대한 혈육이 구성되고, 아버지는 그 꼭짓점에서 장남으로서의 무거운 책임감과 혼란스러움을 겪으며 성장한다. 내가 열 살 때 분임기 할머니가 사망한다. 열 살의 나는 오열을 터뜨리는 고모들과 굳은 얼굴로 빈소를 지키는 삼촌들 사이에서 말없이 눈물을 흘리는 그(아버지)를 목격한다. 이 사건은 내가 그의 고독한 삶을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고, 나는 그의 불온한 삶과 운명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한다.
나는 아내를 만나기 위해 친구의 화실을 찾아간다. 그곳에서 만난 아내는 내가 진심으로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신도 알고 있음을 밝힌다. 나는 아버지가 가한 폭력과 학대, 냉담함을 내게서 비롯될 작은 생명에게 그대로 반복하게 될 거라는 두려움으로 아이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내는 화실에 머무르면서 나의 어릴 적 황폐한 얼굴과 현재의 얼굴을 함께 소묘작품으로 그렸으며, 그 과정을 통해 나의 내면에 대한 연민을 느꼈음을 이야기한다.
아버지의 삶을 추억하는 나는 하나의 이미지에 사로잡힌다. 소용돌이의 종심을 따라 끝없이 회전하는 것 같은 아버지의 삶,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거부하지 못하고 체념과 함께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달리 말하자면 천천히 진행되는 자살과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어릴 적 나 또한 자살을 결행한 기억이 있으며, 우연찮게 죽음으로부터 밀려나온다. 천천히 자살한 남자와 자살을 결행했으나 삶의 이편에 남겨진 남자. 두 남자의 초상은 마치 하나처럼 닮아 있다. 그것은 고독이라는 이름의 초상이다.
아내와 나는 함께 집으로 돌아오지만, 상상임신과 불임치료에 대해선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아내와 함께 우연하게 공개입양을 다룬 TV프로그램을 시청하게 된다. 나는 화면 속에 등장하는 작고 여린, 그러나 버림받은 아이들을 외면하려 하지만 가슴 밑바닥에서 솟아오르는 어떤 울림을 거부하지 못한다. 사랑하고 싶다는, 보살피고 싶다는, 그리고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그 위력적인 기세의 감정을 나는 묵묵히 받아들인다.
깊은 밤, 나는 홀로 깨어서 아버지의 사진을 다시 내려다본다.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나는 아버지를 오롯이 알고 싶다고 생각한다. 어딘가에서 다른 무엇이 되어 있을 아버지의 영혼. 나는 어느 공간과 시간 속에서 아버지와 다시 조우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상상한다. 내가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하고 스쳐지나가더라도 나는 안타까워하지 않을 것이다. 결코 더 요구하거나 욕심내지 않을 것이다. 정말로 그런 순간이 주어지기만 한다면. 깊고 짙은 침묵 속에서 나는 아버지를 오래도록 응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