身體髮膚受之父母 不敢毁傷孝之始也(신체발부수지부모 불감훼상효지시야). 예전에 흔히 인용되곤 했던 효경의 한 구절이다. 우리 몸의 작은 터럭 하나까지도 부모님께 받은 것이거늘 상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 곧 효의 시작이라는 뜻이다.

상투 자르지 말고 머리도 깎지 말라고 해석하면 전근대적이고 고리타분한 유교전통이라는 비난을 면하지 못할 것이지만 억하심정으로 달리 해석하려 하지만 않는다면 이 구절의 부적절성을 지적할 어떠한 단서도 발견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자유롭지만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부모가 자식에게 바라는 가장 기본적이고도 소중한 당부 아니겠는가?

덤벙대다가 차에 치이거나 오토바이 타고 다니다가 넘어지면 어쩌나, 덥다고 냇가에서 놀다가 물에 빠지는 불행이 있을까하는 염려는 어린 자식을 둔 모든 부모에게 공통된 심정이리라. 호기심에 남의 물건 욕심내다가 경찰신세라도 지는 날이면 어찌 부모님께 받은 몸을 소중히 간직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미국에서는 학교에 근무하는 카운슬러들이 무기를 휴대한 채 교내순찰을 한다고 들었다. 최근에는 영국의 학교에도 경찰이 상주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물론 빈민들이 모여사는 대도시 변두리의 열악한 교육환경을 가진 학교들에 국한된 얘기들일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학생들이 아직은 일본이나 서구 선진국의 학생들에 비해 훨씬 덜 폭력적이고 학교 출석율도 높으며 부모를 기쁘게 해 드리려는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학생들이 많은 것은 아마도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효문화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유교의 이념과 그 융통성 없어 보이는 관습을 무조건 찬양할 일은 분명 아니지만 우리 생활문화의 저변을 이루는 유학사상의 아름다운 전통을 적극 이어가려는 노력을 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아마도 ‘효’는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대부분의 선진국들이 청소년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거니와 그 전철을 밟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 위해서도 우리는 효문화의 창달에 힘을 모아야 할 것 같다. 문제는 효의 정신과 실천이 학교에서의 교과교육 방법으로 가르쳐지기 이전에 가정에서 상당수준 몸에 익힐 수 있어야 교육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모든 정의적인 교육이 그러한 것처럼 효행도 바람직한 가정문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몸에 익히고 나서 학교에서 그 의미를 깊이 있게 음미하도록 가르쳐야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시작 곧 효지시야이다. 입신양명하고 후세에 이름을 날리고 부모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일들은 모두가 불감훼상의 효지시야가 갖추어졌을 때 기대할 만한 일들이다. 젊은 날에 자신의 몸을 소중하게 여기도록 가르침을 받은 자식이 어찌 부모에게 불효의 마음을 갖겠는가? 시작이 좋으면 끝도 좋게 마련인 법. 시작은 절반인 동시에 때로는 전부일 수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