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17대 대통령후보 경선이 8월20일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당내 경선이 이렇게 치열하게 전개될 줄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지만 많은 국민들이 우려했던 불협화음 없이 아름다운 경선의 분위기로 마무리되는 듯하다.
여권의 의도가 다분히 깔린 것으로 추정되는 투표 직전 검찰이 발표한 도곡동 땅 소유에 대해 “이명박 예비후보의 재산이라는 증거는 없지만 제3자의 것으로 보인다”는 식의 애매한 발표는 15% 이상의 부동표 향방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당초 예상대로 당심은 박근혜 전대표의 우세, 민심은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우세로 귀결됐으나 국민여론조사에서 이긴 이 후보가 2452표차로 신승했다. 지역적인 예상판세는 수도권, 호남은 이명박 절대우세, 대구경북(TK),충청은 박근혜 우세였는데 그대로 결과에 반영됐다.
이는 이 후보의 정치경력을 보면 추측이 가능하다. 가장 배고픈 시절에 태어나 ‘샐러리맨의 신화’를 창조해 35세에 현대건설사장에 초고속으로 취임, 현대라는 기업을 대기업으로 만든 대표적인 CEO로, 인기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등장할 정도로 ‘이명박=성공신화’라는 개인 브랜드가 국민에게 각인됐다.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준 것이다.
정계입문은 민자당 YS의 권유로 92년 14대 국회의원선거 때 민자당 전국구 25번으로 국회의원이 되었다. 95년 민자당 서울시장 후보경선에서 정원식 전 국무총리에게 패했고 96년 4월 정치1번지라는 종로에서 이종찬, 노무현 등 쟁쟁한 후보를 누르고 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나 선거비용 초과지출이라는 선거법 위반으로 98년 2월 의원직을 사퇴하고 도미했다.
2000년 귀국 후 16대 국회의원에 출마하지 않고 2002년 정계에 복귀해 서울시장에 출마, 열린우리당 김민석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서울시장 재임시 모든 사람들이 반대한 청계천복원, 대중교통체계 개편, 서울숲 조성, 예산절감 등의 업적으로 1000만 서울시민과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이 사는 2000만 수도권시민들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비례대표 국회의원, 반쪽짜리 지역구의원의 취약한 당내기반으로 대통령 경선에 나선 것이 무모해 보일 정도였다. 따라서 40대0의 불패신화를 이루며 전국적인 기반을 다지고 한나라당을 회생시킨 박대표의 당내 기반을 이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나 경제를 살려야 하고 샌드위치 코리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어쩌면 마지막 기회라는 2007년 대선의 시대정신이 이명박을 선택했다고 판단된다. 또한 2번의 대선 실패가 보여주었듯이 한나라당이 영남당, 수구보수당의 이미지로는 정권교체가 어렵다는 당내 변화층이 이명박을 선택한 것 같다.
박대표 우세지역인 충남중에서도 당진은 본격적인 경선전에 박 7, 이 3의 비율로 박대표의 절대우세 예상 투표구였다. 당내 6명의 현역 도·군의원 중 5명이 박대표를 지지하고 신평에 고 박정희 대통령 추모사업회 등 박대통령의 향수가 진한 곳이 당진이다. 삽교천방조제로 당시 농민들의 절대적인 찬사를 받았고 새마을운동으로 당진을 발전시킨 많은 농촌지도자들이 아직도 박대통령을 그리워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자는 경제라는 대선화두와 시대가 원하는 인물, 말만 앞세운 실패한 대통령만 뽑다보니 경제적으로 성공한 인물에 대한 기대, 다음 기회가 없는 이후보의 나이, 개인적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성공한 인물에 대한 존경과 동경이 이명박 후보의 당진군 선대본부장을 맡게되었다.
다행이 이홍근 공동위원장님을 비롯한 많은 원로선배들과 김현욱 전 의원까지 가세한 당진 캠프의 경선 선거운동은 어렵지만 보람 있었고 필자에게 많은 공부가 된 좋은 기회였다. 더구나 평소에 보지 못했던, 듣지 못했던 많은 당원, 대의원, 지역 원로들의 목소리와 격려가 큰 힘이 되었다. 박대표의 흔쾌한 경선승복이 한나라당의 이미지를 한층 성숙된 정당으로 올려놓은 것은 사실이지만 10월에 타당 후보가 결정될 때까지 경선에서 불거졌던 내상을 어떻게 잘 치유하느냐가 관건이 될 것이다.
이제 한숨을 돌리고 당분간은 타당의 경선과정을 느긋하게 지켜볼 수 있는 여유도 생긴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