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5천년이라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세계 역사상 가히 찾아보기 힘든 유서깊은 단일민족이라 하겠다. 하지만 불행히도 아시아 대륙의 극동에 있는 반도에 위치한 까닭에 참으로 많은 외침을 겪어야 했고 항상 긴장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기록에 나타난 것만 해도 990여회에 달하는 외침이라 하니 어언 5년에 한번 꼴로 오랑캐의 침략을 당해 왔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지정학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현재까지 면면히 역사와 전통을 지탱해왔다는 것은 정말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그것도 고구려나 고려의 일부 시기를 제외하면 제대로 강건한 국가의 모습을 갖추면서 외적에 대응한 때가 거의 없다고 하겠다. 상당한 기간 동안 내우외환(內憂外患)에 시달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와 같이 끈질긴 민족적 전통을 유지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우리 민중의 힘이라 단언할 수 있다. 바로 의병 때문인 것이다.

의병의 모습은 우리의 전 역사에서 나타나고 있다. 특히 국가가 허약하고 제도적인 군사력이 미약할수록 백성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내 집과 지역을 지키며 나아가 나라를 지키기 위해 궐기했다.

의병항쟁이 가장 활발한 것은 오랑캐와의 싸움, 특히 왜와의 전쟁에서 많이 일어났다. 그것도 19세기에서 20세기초에 크게 일어났다. 이러한 항일의병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는데 그 중에서 가장 활발했던 곳이 바로 이곳 당진이다.

당진의병항쟁이 가장 치열했던 것은 1908년의 소난지도에서였다고 하겠다. 1908년 3월 15일 소난지도가 의병의 근거지임을 확인한 일제는 일본인 순사 7명과 한인 순사 8명 등 15명으로 구성해 고대면 당진포리 해창에서 배 1척을 빼앗아 아침 6시경 소난지도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의병들은 일제경찰에 대항해 치열한 총격전을 전개했다. 하지만 무기의 열세로 소난지도 마을 뒤쪽의 고지를 넘어 해안을 따라 남동쪽의 돌각지점(둠바벌)에서 의병 36명이 전사하는 등 총 41명이 전사하고 9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 때 50명 내외가 바다에 투신하면서 행방불명되었고 결국 의병은 궤멸되고 말았다. 이때 의병장이었던 홍일초 대장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왔다고 한다. 당진의 의병은 그 뒤에도 지속적으로 항쟁을 계속했다. 특히 정주원 의병장이 1908년 7월17일 대호지면 적서리에서 체포된 이후에도 의병들은 당진과 면천의 전역에서 끊임없이 일제에 대항해 싸워나갔고 이는 국권을 일제에게 탈취당한 1910년까지도 지속되었던 것이다.

올해는 당진의병항쟁이 가장 활발했다고 할 수 있는 소난지도 의병항쟁이 있은 지 100주년 되는 해이다. 간악한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 민족의 해방을 맞이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의병의 항쟁결과라고 생각할 때 새삼 소난지도 의병항쟁의 의미가 더욱 값진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 점에서 나는 두 가지의 희망사항을 피력해 보고자 한다.

우선 소난지도 의병항쟁 100주년을 기념해 의병항쟁 유적지를 일제히 정비했으면 한다. 소난지도의 의병총을 성역화해 제대로 관리할 수 있도록 함은 물론 의병의 활동 상황이 밝혀진 장소를 물색해 표지판을 세우고 의병장의 묘소를 일제히 정비했으면 한다. 또한 의병관련 문예활동이나 학생들의 각종 순회행사에 반드시 넣어서 학생들에게 순국정신을 함양케 하는데 도움을 주도록 해야 한다.

두 번째는 대호지 만세운동과 연계하여 하나의 권역으로 벨트화해 당진의 민족운동이라는 주제로 유적지를 묶어 보는 것이다. 특히 대호지면 적서리에서 석문면 초락도리까지의 도로가 완전히 개통되는 시점을 활용해 항쟁 유적지를 이어보면 더욱 좋을 것이다. 일제 경찰이 소난지도로 향하기 직전에 고대면 당진포리에서 초락도를 거쳐 소난지도까지 들어갔던 통로, 그리고 대호지면 적서리에서의 정주원 의병장이 체포됐던 장소, 대호지면 사성리의 남주원과 이인정이 살았던 집터를 살펴보고 조금리의 창의사와 면사무소 광장, 그리고 대호지 면민이 천의로 나아가던 길로 나오든지 아니면 다시 도이리로 들어가 만세운동의 최초 순국자인 송봉운 묘소를 지나 충장사를 거쳐 도호의숙의 집터를 지나 천의로 나와도 좋다.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천의 장터에서의 만세운동장면을 떠올리면서 기념탑까지 걸어보아도 매우 뜻깊을 것이다.

100여명이 순국한 것으로 추정되는 소난지도 의병항쟁은 그 인원만으로 볼 때에 좀처럼 흔한 의병항쟁이 아니다. 또한 1000여명이 만세항쟁을 전개해 그 중 200여명이나 일제에 의하여 형벌을 받았고 최근 121명이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대호지 만세운동의 경우는 정말로 흔치 않은 일이다. 의병항쟁에서 독립만세운동까지 한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일어난 사례는 더더욱 흔한 일이 아니다. 민족운동의 성지로서의 당진이 거듭 새겨지는 순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