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안 작은섬 외딴 바닷가에 묻혀있던 한말의병들의 피맺힌 한일투쟁사가 뒤늦게 발굴되었다. 석문면 북쪽 교로리에서 물길로 약 5㎞, 배에서 내리면 벌판위에 50평 남짓한 묘역이 눈에 뜨이고 ‘의병총’이라고 새긴 비석 뒤에 초라한 봉분이 있다. ‘1907년 을사조약에 반기를 들고 국권을 회복하고자 왜군과 싸우다가 장렬히 순국하신 홍일초 휘하 의병이 고이 잠든 곳’이라는 비문이 의병총의 역사를 말하여 준다.
소난지의병항쟁은 1905년 국치의 을사늑약으로 국권이 침탈되자 경기도 수원 지방에서 거병하여 한때 포군을 거느릴 정도로 세력이 막강했던 홍일초 휘하의 의병들이 일군의 초토화작전에 밀려 충남 당진으로 건너오면서 병오년 홍주전투에서 패한 의병일부와 합류해 당시 호남 등지의 관곡 운송선들의 중간 정박지였던 석문면 소난지도에 의병 본진이 유둔하게 되었다.
소난지도는 육지와 떨어져 신변 안전과 식량조달이 용이한 조건 등으로 의병들이 이곳에서 재기를 도모하던 중 이를 탐지한 한·일 순사 15명이 솔가지로 위장한 배로 기습하여 1908년 3월15일 9시간 동안 총격전이 벌어졌고 죽음을 각오하고 싸운 100여명의 의로운 최후를 맞았다.
국권을 되찾으려는 우국충정만으로 봉기한 의병들이었기 때문에 무기도 변변치 못했고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했었지만 진충보국과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일제의 강압에 맞서 싸웠던 소난지의병항쟁은 이후 질곡의 시대를 거치면서 단절의 역사 속에 묻히고 멸실될 위기에 이르렀으며, 오랜 세월 돌보는 이 없이 풍랑에 씻겨 유골이 나와 뒹굴기도 하며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에 의해 도굴 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겨온 석문중학교 신이균 이사장과 김부영 교장 등이 1970년 교직원 및 학생들과 최을용씨 등 소난지 주민들과 함께 흩어진 유골을 수습 봉분을 새로 봉축하고 묘역을 정비하여 호국의 얼과 애국심 고취의 정도장으로 삼아 매년 현충일에 참배행사를 거행해왔다.
한편 신양웅 교장이 중심이 되어 끈질기게 사료수집 활동을 벌여 1980년 88세로 작고한 조예원 옹의 증언을 녹취하는 등 고증자료 수집에 힘써온 가운데 1982년 8월5일 의병총비를 건립하고 소난지 의병항쟁기념사업회가 발족되면서 거군적으로 추모행사를 거행해오고 있고 2003년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에서 소난지도 의병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를 수행하여 그동안의문으로 남아 있던 소난지도 의병의 실체가 구명되여 학술고증을 받고 동년 11월20일 학술대회를 열어 학계에 보고되었다.
의병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계승하고 조국과 민족보다는 개인주의가 성행하는 요즘 우리들에게 선열들의 애국정신을 일깨워 다시한번 재도약 할 수 있도록 소난지도의병항쟁을 역사의 산교육장으로 승화시켜야 할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당진군민 모두가 우리지역의 자랑스러운 소난지도 의병항쟁사를 소중하게 마음에 품고 함께 계승·발전시켜 나아가기를 바란다.
끝으로 소난지도 의병항쟁 제99주년 추모식을 앞두고 신명을 바친 선열들께 삼가 옷깃을 여미고 머리숙여 명복을 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