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국민들의 뇌리에서 잊혀져 가고 있지만 한 때 대선주자로도 거론되던 고건 전 총리를 아직도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고 전 총리는 여러 정권을 거치면서도 장관과 서울시장, 총리를 맡으며 최고의 관운을 타고 난 행정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그를 대선 예비주자로 부각시킨 사건은 다름 아닌 노무현 대통령 탄핵으로 63일간 권한대행을 맡으면서 보여 준 행보이다. 사상초유로 대통령 권한대행을 수행하면서 고 전 총리는 자신의 뜻을 마음대로 펼치지 않았다. 법적 권한이 충분함에도 고 전 총리는 대행이 갖는 ‘현상유지’라는 역할에 충실했다. 고 전 총리가 능력이 부족해서 자신의 뜻을 펴지 않고 노무현 정부가 추진하던 방향대로 현장유지에만 힘을 쏟은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권한대행이 자신의 뜻을 펼치는 것은 대행기간이 끝나고 넘겨받을 자리의 정식 주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순성면 성북리 전원마을 조성사업에 대한 마을정비구역지정이 지난 6월23일자로 고시됐다. 한국농어촌공사와 당진군이 순성면 성북1리 아미산 자락 7만6412㎡(2만3천여평)에 추진하고 있는 66세대의 전원마을은 환경훼손과 지역 커뮤니티 파괴 등의 우려를 불러일으키며 환경단체와 상당수 마을주민들의 반발을 초래해왔다. 이로 인해 성북리 전원마을 사업은 지난해 국회 국정감사에서 정식 안건으로 논의되기도 했으며 올 상반기에는 사업추진이 잠시 보류되기도 했다.

그러나 충청남도는 새로운 민선도지사가 취임하기 직전인 6월23일자로 성북리 전원마을 조성사업에 대한 마을정비구역 지정을 고시했다. 지정 고시문에는 ‘충청남도지사’라고 고시의 주체를 명시했지만 현재 충남도지사는 공백인 상태로 부지사가 직무대행을 맡고 있는 상태다. 신임 도지사가 선출돼 취임을 고작 일주일 남긴 상태에서 전격적으로 고시한 셈이다. 다른 사안도 아니고 해당지역에서 전원마을 조성사업을 둘러싸고 찬반이 엇갈리고 있는 민감한 사안임을 고려하면 새로운 도지사에게 정책적 판단을 구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럼에도 충청남도는 새로운 도지사가 취임하기도 전에 날치기 하듯 고시를 강행했다. 지방자치의 원리는 주민들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자치단체장이 해당 지역의 정책적 사안을 처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충청남도는 주민들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지도 않은 임명직 부지사가 도지사 공백을 틈타 주요한 정책적 결정을 내림으로써 지방자치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 농어촌공사와 함께 공동 사업시행예정자로 이름을 올린 당진군도 마찬가지다. 충청남도에 따르면 농어촌공사와 당진군은 지난 4월28일 충청남도에 마을정비구역 지정을 신청했다. 이 당시 역시 민종기 전 군수가 3월30일 예비후보로 등록함으로써 직무가 정지돼 부군수가 직무대행을 맡고 있었을 때다. 현직 군수가 비리혐의로 잠적한 어수선한 시기에 지정고시를 신청한 것이다. 당진군의 최고봉이자 상징인 아미산의 한 자락을 통째로 훼손하게 돼 해당 지역주민들 간에 찬반의견이 엇갈리고 환경단체에서 일제히 반대하고 있는 첨예한 상황에서 다음 민선군수가 선출되기도 전에 서둘러 골치 아픈 문제를 처리한 셈이다. 담당자들은 마음 편했을지 몰라도 당진군의 지방자치는 한 걸음 후퇴했다. 주요한 정치적 판단을 차기 민선군수에게 맡기지 않고 직무대행 체제 하에서 처리한 것은 주민들로부터 선출되지도 않고, 권한을 위임받지도 않은 자치단체가 민주주의의 틈새를 악용해 제 멋대로 권력을 행사한 경우다.

권한대행 기간의 충청남도나 당진군이나 이번 아미산 전원마을 사업과 관련해 지방선거를 통해 새로 선출될 자리의 정식 주인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았다.

새로운 민선 자치단체장의 정책적 판단기회를 차단한 채 권한대행 체제 하에서 진행된 성북리 전원마을 조성사업 마을 정비구역 지정 신청 및 지정고시는 무효다.

충청남도는 환경을 훼손하고 마을공동체를 파괴하는 성북리 전원마을 조성사업 마을정비구역 지정고시를 취소해야 한다. 또한 성북리 전원마을사업의 공동 시행예정자인 당진군은 당장 사업추진을 포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