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에서는 예부터 딸이 결혼하면 ‘출가외인’이라고 불렀다. 딸이 결혼하면서 남편의 성을 따르게 되고 ‘죽어도 시댁의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팽배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보다 조선시대에 그런 풍습과 관례가 더욱 강했다고 전해지는데 유교적 가치관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아직도 부모가 고령이 되면 딸보다는 아들이 모시는 것이 일반적인 것은 이런 관습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평면 신흥1리 홍정자(63)씨는 평생 어머니 김수영(89) 할머니를 모시고 살아왔다. “딸이 어머니를 모시는 것이 무슨 특별한 것이냐”며 인터뷰를 극구 거절하던 홍 씨. 지난달 30일 열린 면천향교 추기석전대제에서 효녀상을 받았다.
“어머니가 자식을 저 하나만 두셨어요. 자식이 하나인데 아들이고 딸이고가 뭐가 중요한가요. 낳아주신 어머니를 제가 돌보는 건데 상이라니 가당치도 않아요.”
홍 씨는 이날 상을 받는 것도 몰랐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상을 주고 싶다고 해도 극구 거절했던 홍 씨는 마을 이장이 수상자 명단에 홍 씨를 올리고 수상자로 결정됐을 때까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상 받기 전날 이장이 찾아와 내일 상을 받으러 가야 한다는 말을 했다고. 홍 씨는 “저는 정말 그런 상을 받을 사람이 아닌데...”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홍 씨가 당진으로 온 지는 13년. 부천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신흥1리가 고향인 남편(김종곤)을 따라 당진으로 내려왔다. 당진의 삶도 쉽지는 않았다. 남편의 사업이 2005년 발생했던 불의의 사고로 주저앉았던 것. 홍 씨는 “어머니가 지병으로 쓰러지셨을 때 사고가 나서 어려움이 더했다”며 “그 일로 결국 사업을 접어야했다”고 말했다.
“누워 계시는데 제가 너무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인천의료병원에 있었는데 어떻게 제가 할 방법이 없었어요. 기다리는 수밖에요. 온갖 생각이 다 들었어요. 좀 더 잘해드릴걸... 조금만 더 기쁘게 해드릴걸... 하는 후회가 끝없이 밀려왔어요.”
다행히 병세에 차도가 있었지만 중풍으로 인해 거동은 거의 불가능했다. 대소변을 받아내면서 당진의 사업을 돌보느라 너무 힘들었다고. 그러나 그런 힘든 과정을 홍 씨의 어머니는 이겨냈다. 휠체어에 앉은 채로 퇴원해 지금은 혼자 거동이 가능할 정도로 회복된 것이다. 홍 씨도 오히려 “어머니에게 감사하다”고 말한다.
“평생 어머니와 함께 살았어요. 어머니는 움직이고 간신히 차려진 식사만 하실 뿐 혼자 밥하거나 반찬 만들지 못하시죠. 당연히 제가 거의 매일 옆에서 돌봐드려야 해요.”
“아들이든 딸이든 자기 부모를 자기가 모시겠다는데 ‘출가외인’이니 뭐니 하는 말이 왜 나오는가”라고 반문하는 홍 씨. 홍 씨는 “마을 부녀회원들과 함께 요양원으로 봉사를 자주 다니는데 어머니를 보며 그분들에게도 최선을 다하고 싶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