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오바마 대통령을 당선시킨 시민단체 무브온의 ‘엘리 프레이지’는 ‘생각조종자들’이라는 책에서 인터넷이 직접민주주의를 달성시킬 것이라는 예측이 잘못되었다고 한다. 오히려 그는 우리가 인터넷을 통해서 생각을 조종당할 수 있다고 한다. 포털이나 검색서비스 업체는 컴퓨터 서비스 이용자의 클릭을 분석하여서 맞춤 서비스를 강화하고 있다. 따라서 사용자는 순환적인 검색을 하게 되고 필연적으로 업체에게 생각을 조종당하게 된다는 논리다. 우리가 검색하는 분야를 업체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으로 판단하여서 같은 단어를 검색하더라도 그 분야의 정보만을 보여준다. 우리는 익숙한 것을 좋아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더욱 같은 성향의 의견만을 보고 시각은 본의 아니게 좁아지게 된다. 아날로그 시절에는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보면서 선호하는 것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 이외의 것에도 관심을 가질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개개인이 너무나 몰입해 있어서 계층 간, 세대 간, 진보 보수 간에 대화와 소통이 어려워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행정에도 있는데 바로 무의사결정이다. 사전적으로 무의사결정은 사회의 지배적 가치, 신화, 정치적 기관과 절차 등을 지배집단이 조작함으로써 의사결정의 범위를 안전한 이슈에만 한정시키는 관행이다. 특정한 사안에 대해서 신문에 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든가 자신의 성과에 대해 과대포장하여 보도자료를 뿌리는 것 또 자신들의 이익에 해가 되는 문제제기를 하는 집단을 빨갱이로 몰아 부치거나 수구꼴통으로 지칭하는 것 등이다. 이들은 모두 대중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만을 보게 하여 익숙하게 하려는 조작이다. 드디어 대중은 스스로 익숙한 것을 옳은 것으로 확신하고 스스로를 지배집단의 일원으로 생각하며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결정을 스스럼없이 내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당진군이 백 몇 년만에 시로 전환되었다고 쾌거란다. 실제로는 건국 이래 또 인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인데 소심하기는... 당진시는 시작에 의미를 부여하고 새 출발을 다짐하였고 비전을 발표했다. 비전을 제시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비전이라는 것은 과연 누가 어떻게 만들었을까? 예전에 당진시가 2025년 50만이 될 것이라고 인구추계 용역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거액을 들인 용역 보고서에 교수님이 제시한 50만 추측은 행정안전부 공무원의 너무 과대하게 추계되었다는 한마디에 30만으로 조정되었다. 소위 말하는 전문가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연구용역은 돈을 넣으면 근거를 만들어주는 자판기임이 증명되었다. 관련 공무원은 행정은 시민의 사기를 위해서 그 정도는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 일이 사기앙양과 희망의 제공에서 끝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제는 인구추계에 근거해서 온갖 사회적 인프라를 구축하여야 하기 때문에 예산이 낭비될 위기에 처했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민자 고속도로의 문제가 그렇다. 행정에서 도로를 유치(뚫기)하기 위해서 교통량 예측을 엉터리로 과다하게 잡아오던 관행이 있었다. 결국 정부는 민간기업과 엉터리 교통량에 맞추어 수익보장 계약을 하였다. 그 결과 국가는 천문학적인 세금으로 민간기업에 손실을 보상해주고 있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심지어 우리에게 묻지도 않은 예측과 비전제시로 인해서 나라는 빚더미에 올라앉고 우리들의 삶은 피폐해지고 있다.
발전이 과연 1차 산업에서 2차 3차 산업으로 가는 것이고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이 되는지, 인구가 늘어나면 경제가 살아나는지 의문이 들지 않는가? 요즘 대화와 소통의 중요함에 대해서 논하고 있지만 그 부재의 원인이 바로 통제된, 제한된 정보의 섭취이기 때문에 우리는 좀더 불편함을 감수하려는 자세를 가다듬어야 한다. 즉 우리는 근본적인 의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답을 요구해야 한다.
사람은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 장밋빛 환상을 보여준다고 해서 무작정 따라가지 말라. 그들은 늘 잘못된 곳에 도달하면 이렇게 이야기 한다. “여기가 아닌가 봐, 그런데 왜! 따라왔어? 따라온 것은 너희들의 자유의사로 온 것 아니야?”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심지어는 후손의 고통에 대해서도. 우리가 생각을 조종당하고 있지는 않은지 늘 깨어 있으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