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주] 농한기에 접어들면서 마을 경로당이 ‘성수기’를 맞았다. 한 해 농사를 마무리 지은 어르신들이 경로당에 모여 무료하고 적적한 시간을 함께 나누고 있다. 윷도 놀고, 장기도 둔다. 끼니 때가 되면 밥 당번을 정해 시래기된장국에 점심도 함께한다. 어르신들이 한데 모인 경로당을 찾아 마을마다 전해져 오는 전설부터 수십 년 전 마을의 옛 모습과 생활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한다. 옛날을 기억하고 있는 어르신들이 계신 지금 듣고, 기록해 놓지 않으면 작지만 소중한 마을의 역사가 그대로 묻힐 것이라는 우려가 ‘기억으로 쓰는 마을의 구술사’ 신년기획 ‘경로당을 가다’를 시작하게 했다.
새우젓 실은 황포돛대 오가던 구양도
서야고등학교를 지나 예산으로 향하는 32번 국도는 쭉 뻗은 대로와 길게 늘어선 가로수, 양 옆으로 펼쳐진 들녘으로 사계절 어느 때나 아름다운 농촌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이 도로 끝, 며칠 전 내린 눈으로 눈부시게 하얀 들녘 위로 야트막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곳이 바로 옥금리다. 옥금재라고도 불린 옥금리는 수차례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예산과 천안에 속했다가 현재 당진시 합덕읍에 편입되었다.
“시 경계에 있는 마을이다 보니 예전에는 덕산도 됐다가 천안도 됐다가 했지. 그래서 아직까지 덕산촌, 천안 동머리라는 이름이 남아 있는 게지.”(손창복, 85)
옥금리는 윗뜸이라 불리는 1반, 중안뜸 2반, 덕산뜸, 강습소로 이뤄진 3반, 덕산촌, 흥덕뜰이라 불리는 4반, 천안 동머리 5반으로 이뤄져 있다.
예산 신암면 신택리로 넘어가는 다리가 놓인 부근을 구양도라 하는데 조선시대에는 섬이었다고 한다. 옥금리 남동쪽에 자리한 구양도 부근은 삽교천의 심한 자유곡로로 S자형으로 꾸불꾸불해 섬이 자연적으로 생겼는데 마치 구절양장에 의해 생긴 섬이라 구양도라 이름 붙었다 한다. 항간에는 조선시대 귀양 보냈던 옥이 있어 붙은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지금은 논으로 메워져 있고 논 아래로 삽교천 물이 흐른다.
“우리 어릴 적만해도 구양도 다리 아래 새우젓 배가 들어왔었지. 바닷물이 하루에 두 번 들랑날랑 했었지 왜~ 예산과 당진을 오가는 나룻배도 다녔지.”
“왜 아니여~ 구양도 다리 아래서 곤쟁이도 잡았지. 팔기도 하고 먹기도 하고 했잖여~”
“구양도 다리는 최근에 새로 놓은 거고. 어릴 적에는 목다리였어. 일제시대 때 다리를 다시 놓았는데 그나마 그것도 전쟁 났을 때 폭격 맞을 뻔 했는데 겨우 살아남았지.”
“나 태어나기 한참 전에는 구양도 뿐 아니라 옥금리 들판이 죄다 갯벌이었다더만.”
구양도 나루터는 합덕 사람들이 신례원으로 건너가 열차를 타고 서울을 다니던 길목이었다. 구양도에서 배를 타고 인천을 다니기도 했다고.
삽교천 막히기 전, 천수답이 대부분
산 하나 없이 탁 트인 들녘 마을 옥금리 사람들은 예부터 쌀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때문에 물이 중요하고 귀했다. 마을 사람들은 삽교호방조제가 축조돼 바닷물이 막히고 삽교천이 농업용수로 쓰이면서 물 걱정을 덜었다. 이전에는 농사지을 물이 부족해 하늘만 처다봐야 하는 천수답이 대부분이었다고.
“삽교천 막히기 전까지는 합덕제랑 덕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끌어다 농사짓고 살았지. 대부분 천수답이었어. 비 안오면 콩 심고 수수 심고 했었어.”
“먹는 물은 워떻고. 뜸마다 둠벙이 있었는데 여름이면 날파리가 떠다녀서 체에 걸러서 끓여 먹었지왜. 이제는 그 둠벙들도 다 없어졌지.”
옥금리까지 바닷물이 들어올 때는 장마철마다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단다. 주민들이 무너진 제방을 보수하느라 다치는 일이 부지기수였고 짠 바닷물이 닿아 농사를 망치는 일도 허다했다고.
“지금이야 기계로 제방을 높이 쌓았지~ 그때는 다 사람 손으로 쌓았응께. 간신히 바닷물 넘치지 않는 정도였어. 헌데 물이 가득 들어차는 백중사리 때에는 바닷물이 제방을 넘어서기 일쑤였어. 그런 날이면 동네주민이 죄다 나와 둑 막느라 정신이 없었지. 집도 잠기고 논도 잠기고 말도 못했지.”(김춘산, 77)
서야고, 합덕농협이 생겨난 마을
옥금리는 합덕 지역사회에 중요한 기관을 배출해 낸 마을이다. 그 중 하나가 바로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서야중·고등학교다. 1958년 서야중·고등학교의 전신인 삼민고등공민학교가 옥금리에 자리했었다. 지명에 강습소라는 이름이 남아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내가 삼민학교 1회 졸업생이여. 당시 우리 동기가 14명이었지. 지금 합덕농협 미곡종합처리장 사무실 자리가 바로 학교자리였어. 교무실 하나 교실 하나 있었지. 교장이 유증열, 교감이 유재하, 음악은 김춘자, 국어는 주건한, 역사는 유재오 선생이 가르쳤었어. 처음에는 비가 오면 책상이 둥둥 떠다녔는데 강진태 영어 선생이 인천 미군부대에서 콘센트를 가져다 학교를 짓고 공부했었어.”(홍옥표, 70)
옥금리에서 시작된 또 하나의 기관은 합덕농협이다.
“당시에는 마을마다 농협이 있었어. 이동농협이었지. 이장이 조합장을 맡고 주민들이 조합원으로 구성됐었어. 헌데 합덕에서는 옥금리가 제일 잘 되었지. 다른 마을은 점점 없어지고 합덕농협이 옥금리 농협과 합해져 지금의 합덕농협이 된 거야.”
현재 옥금리에 자리한 합덕농협 미곡종합처리장 정문 앞에 초대조합장을 맡은 고 서정록 조합장을 기리는 비가 서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