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 할아버지!”

적서리 송세동(80) 할아버지에 대해 물어보면 사람들이 하나같이 하는 소리다. 대호지면에서는 할아버지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활발한 사회활동을 해왔다. 받아보지 않은 상이 없을 만큼 일 복도, 상 복도 많았다. 그는 활동했던 모든 역사를 보자기에 차곡차곡 쌓아 보관하고 있다. 그 양만 해도 방 한 칸을 다 채울 정도란다. 한 개인의 역사가 지역의 역사로 남았다.

활발한 사회활동에

대통령훈장까지 받아

1962년, 4-H가 한국 농촌사회에 퍼져나가고 있을 무렵 송세동 할아버지는 4-H 자원지도자로 사회활동을 시작했다. ‘농사개량구락부’라는 청년 농촌모임을 통해 농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70년대 들어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새마을지도자로 청장년의 시기를 보냈다. 무려 22년 동안 지도자로 살았다. 한 우물을 오래 파다보니 지역에서 이름이 났다. 그만큼 열심히 일했다. 송세동 할아버지는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군수, 도지사, 내무부장관, 그리고 대통령 훈장까지 받았다.

“서리를 놀이삼아 하던 시절이 있었지. 농촌 사람들은 순박했지만 너무 무지했어요. 당시에 농촌계몽운동처럼 교육이 활발하게 이뤄지던 시기여서 이런 활동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기 시작했는데 예까지 왔네.”

지도자, 정당활동, 노인회장까지

할아버지는 지역 일에 발 벗고 나서 참여했다. 눈덩이가 커져가듯 지역사회에서 이름이 알려질수록 더 많은 일들이 찾아왔다. 농협이사는 물론이고 박승산 군수와 김현욱 국회의원이 활동하던 시절 자민련에 몸담은 적도 있다.

송 할아버지는 “거쳐보지 않은 일이 없다”며 “이것저것 일하다 보니 여러 곳에서 제의가 들어왔다”고 했다.

노년기 들어서는 적서리 노인회장도 맡았다. 술과 담배를 전혀 하지 않는 그는 경로당에 노인들이 모여 술, 담배, 화투를 치며 시간을 때우는 모습을 영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 노인회장을 하면서 경로당 문화를 바꾸기로 했다. 건강체육부, 서예부, 시조음악부, 봉사부 등을 만들어 경로당에서 취미생활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모범경로당으로 소문이 났고, 상도 받았다.

농사일까지 아내 홀로 도맡아

눈물로 뒷바라지

송세동 할아버지가 이렇게 사회에서 인정받는 동안 아내 정간난(75) 할머니는 눈물로 세월을 살았다. 모든 집안일은 물론 농사일까지 할머니 몫이었다.

“교육을 받느라고 한 보름을 나가 있었어요. 집에 돌아오니 할멈이 울면서 혼자 마늘을 캐고 있더라고. 비는 부슬부슬 내리는데….”

미안한 마음을 차마 표현하지 못하고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웃음을 주려고 덩실덩실 노래를 불렀단다.

“잘살아 보세~ 잘살아 보세~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

스물두 살에 시집와 할아버지가 바깥일에 매진하는 동안 할머니는 단 한 번도 바가지를 긁거나 짜증내 본 적이 없었다.

정간난 할머니는 “배우지 못한 한이 컸는데, 할아버지가 많은 사회활동을 하는 것도 배움이 있어 하는 것이려니 여겼다”며 “힘든 삶을 살아 왔지만 할아버지를 존경하는 마음도 크다”고 말했다.

“할멈 없었으면 이렇게 못 살았을 거여. 할멈이 내조를 참 잘했어.”

우애 깊은 가족, “나는 사랑 부자”

할아버지가 이러한 삶을 살기까지 가족의 영향이 가장 컸다. 할아버지의 조부는 4.4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해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홀로 남은 할머니가 외아들이었던 아버지를 길렀다. 아버지는 고대면 항곡리 훈장의 딸인 어머니와 결혼해 송세동 할아버지를 포함해 9남매를 낳았다.

송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우리 형제들을 사랑으로 키웠다”며 “우애와 가정의 화목을 가장 강조하셨다”고 말했다.

송 할아버지의 어머니 역시 지극한 효부였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정성으로 3년 상을 치렀다. 남편이 생사의 문턱 놓였을 적에는 약지를 끊어 입에 피를 수혈했다. 지성이면 감천이었는지 그 후로 10년을 더 사셨다고.

송세동 할아버지는 여든의 나이에 ‘사랑’을 노래한다. 할머니의 사랑, 어머니의 사랑, 아내의 사랑. 그리고 형제와 자녀들의 우애. 그는 스스로 “사랑 부자”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