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되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으랴마는, 빛 한줌 없는 긴 터널을 지나오듯 살아온 이에게 지금의 삶은 더욱 특별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민문자(71, 우강면 세류리) 씨에게 삶은 ‘선물’이다.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않은 그가 글쓰기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한 것은 1995년부터다. 월간 농업잡지인 <새농민>에서 주최한 창간 34주년 기념 공모전에 우연히 참여했다가 그의 수기 ‘영원히 피지 않는 박꽃’이 당선작으로 뽑혔다. 사고로 남편을 잃고 힘겹게 6남매를 키우며 살아온 그의 삶이 담긴 글이었다.

사고로 남편 잃고 형편 기울어

민문자 씨는 스물다섯 살의 나이로 고향 순성면 본리를 떠나 송악읍 영천리로 시집을 갔다. 큰 딸이 15살이 되던 해 도로에서 경운기가 구르는 바람에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함께 타고 있던 그도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러 마을 사람들은 “줄초상을 치르게 생겼다”고 말할 정도였다. 가까스로 살아난 그는 몸이 성하기도 전에 아이들 뒷바라지와 담배농사와 소를 키우며 가정을 꾸려나가야 했다.

“농사일뿐만 아니라 안 해본 일이 없었어요. 자식들이 손가락질 받으며 살게 하지 않으려고 정말 열심히 살았어요. 제가 바깥에서 일하느라 아이들이 집안일을 많이 도와줬지요.”

사고 이후 건강이 악화돼 다리 수술을 했다. 고관절이 썩어 들어가 장애를 얻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건강악화는 집안 형편이 기울어지는 것으로 이어졌다.

삶의 깨달음 담담하게 풀어내

민 씨는 “가끔 ‘사고 당시에 나마저 세상을 떠났다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을 하면 아직도 눈물이 난다”며 “지금은 다 지난 이야기이고 마음에 여유가 생겨 이렇게 말을 하지만 당시에는 견디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이렇게 힘겨운 나날이 반복되는 가운데서도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많았다. 눈앞이 캄캄할 때면 주위 사람들이 해결의 열쇠를 손에 쥐어줬고, 문제들이 해결될 때야 비로소 주변의 고마운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인생을 살면서 깨달은 삶의 진리를 그는 글 속에 담담히 녹여냈다. 신파극처럼 구구절절 처량한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유려한 문체도 아니다. 그의 글 속엔 온전히 그가 있다.

남편을 잃고 가계부 겸 일기를 끄적끄적 써내려가던 게 습관이 됐고, 우연한 계기로 공모전에 참가하게 되면서 글쓰기에 재미를 붙였다.

“솔직함과 진실함이 가장 중요”

글을 써서 여러 곳에서 상을 탔지만 민 씨는 “호미자루 쥐고 밭 매던 촌부일 뿐”이라며 “부끄러운 글”이라고 말했다.

“그저 가식 없이, 있는 그대로 제 삶을 쓰는 거지요. 솔직함과 진실함이 가장 큰 무기인 것 같아요.”

동생들을 가르치느라 초등학교 졸업 이후로 배움의 끈을 놓아야 했던 민 씨는 살아가는 내내 배움에 대한 그리움이 컸다. 젊은 시절엔 홀로 남편의 빈자리를 채우느라 글을 쓰는 것은 엄두도 못 내던 일이었다.

그래서 지난해 자신의 이야기와 공모전에 입상했던 글들을 엮어 자서전을 냈다. 그는 이 책을 계기로 당진시 내 노인대학을 돌아가며 강의도 하게 된 지금의 현실이 믿기지 않는다. 머리카락을 팔아 공부를 시켰던 국문학 교수가 된 동생이 이제는 민 씨에게 “나보다 누이가 낫다”고 말한단다.

‘나’를 위한 여생 보내고 싶어

그의 나이 올해로 일흔 하나. 뒤늦게 재능을 발견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있다. 기쁘고 행복했던 순간뿐만 아니라 고단했던 젊은 시절조차도 그에게는 모두 글감이 돼, 또 다른 고된 삶을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준다.

올해에도 노인대학 강의를 계속 이어갈 예정인 민 씨는 오늘도 글을 쓰고 있다. 손녀가 사다 준 공책에 펜을 꾹꾹 눌러 가며 쓴 글로 벌써 여러 페이지가 넘어갔다.

그의 막내 딸 김은실 씨는 “엄마가 지금껏 해보지 못했던 일들을 하며 늦었지만 본인의 인생을 즐기면서 살아가는 게 보기 좋다”며 “나이가 들어도 항상 정체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고 실천하는 모습으로 자손들에게 인정받으며 사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앞으로 내게 주어진 시간은 자식들이 아닌 나를 위해서 쓰고 싶어요. 힘겹게 젊은 날을 살아왔지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지요. 남은 인생을 잘 설계해서 제2의 인생을 살아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