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대전실업전문대학 축산과를 졸업하고 마땅한 취직자리를 찾지 못헤 이리저리 방황했다.

그러다가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먼저 『학원. 진주』월간 잡지사 견습 사진기자로 사회 첫발을 내딛었다.

광활한 사회 속에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삶의 길을 찾기 위해 몹시도 헤맸다. 그 후 광동제약, 대한광학에 몸담았으나 결국은 흙에 돌아가 전공한 축산을 살려야겠다고 결심해 귀향했다.

고향에 돌아와 즉시 방황하는 마을 청소년들을 모아 새 생활의 길을 찾을 수 있는 힘과 용기를 갖게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4-H조직에 착수했다.

많은 난관이 있었지만 여기에 굴하지 않고 모든 화술을 총동원해 뜻있는 몇몇 청소년들을 설득해 1976년 2월 12일에 역사적인 “남양 4-H”가 발족 됐다.

그리고 고향에 돌아와 자영으로 한, 두 마리의 가축부터 시작해 보려고도 생각했지만 집안 식구들의 기대와 자신의 안목을 생각하니 마음이 허락치를 않았다. 또한 전공분야에 실제로 경험한 바도 많지 않고 자본도 없으며 아직은 젊음의 꿈과 포부도 크기에 여러 가지로 방황하게 됐다.

그래서 나는 4-H활동이 끝나갈 무렵인 1976년 11월 21일 집을 떠나 홍성군 광천읍에 있는 광천 재건중학교에서 불우한 학생들을 위해 봉사했다. 교사와 광천광문학원 수학전임강사로 몸담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1977년 9월1일 서산군 운산면 거성리에 위치한 김종필 씨가 운영하는 삼화축산(주)연수생으로 다시 축산 인으로 돌아왔다. 결국 졸업 3년 만에 축산인의 길을 다시 걷게 된 것이다. 축산에서 진정한 보람을 얻고자 1978년 1월 18일에 가축인공수정사 면허증을 획득하고, 내  인생의 나침반이나 다름없는 이기동 교수님을 찾아뵀다. 교수님은 과묵하면서도 인자하셔서 강한 인상을 풍기셨다.

그 후 강추위가 몰아치던 날 이기동 교수님을 따라 며칠 전에 가축인공수정사 자리가 비었다는 충청남도립 유성종축장을 찾았다.

류창구 장장님은 “ 고향이 서산인데 박봉으로 객지에 나와 근무할 수 있겠나?”하시며 물었다. “예, 저는 봉급보다도 축산 현장에서 가축과 생활하며 인생설계를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렇게 종축장 근무에 임하며 축산학도로서의 길을 걷게 됐고 이기동 교수님은 내 인생의 시작을 이끌어 준 가장 존경하는 은사님으로 남게 됐다. 충청남도립 유성 종축장에 근무할 수 있는 것은 이기동 교수님의 은덕이었다.

그러나 전문지식이 부족한 나로서는 돼지가 어떻고 돼지 이표는 어떻게 봐야하며,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불안스럽기까지 했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부족했고 어려움이 많았다.

그때마다 나는 교수님께 전화도 하고, 찾아뵙기도 했는데 교수님은 나를 마치 친자식처럼 챙겨 주시곤 했다. 이기동 교수님은 그런 일을 전혀 귀찮게 여기시지 않으셨다.

이기동 교수님은 오히려 그것을 하늘의 뜻으로 여기고 부족하기만 했던 나를 더욱 격려하고, 채찍질을 하셨다. 그 후  당진시청에서 34년이란 공직생활을 정년퇴임으로 마무리 하셨다.

문득 ‘욥기’ 8장7절에서 “시작은 미약했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하신 성경 말씀이 생각났다.

이기동 교수님은 늘 부족한 나를 노력과 사랑으로 채워주셨고, 나를 보시면 한 번도 미소를 마다하지 않으셨으니 그 마음과 정성이 하늘을 감동케 했음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