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악은 치유한다. 팍팍한 도시의 삶도, 고된 농촌의 삶도. 혈기왕성한 젊은이의 좌절도, 힘을 다한 노인의 무력함도…. 그래서 음악은 인간의 삶, 모든 순간에 우리와 함께해 왔을 것이다.
“왜 음악이 좋으냐”는 우문(愚問)에 그는 “그냥”이라고 현답(賢答)했다. 진짜 좋아하는 것에는 이유가 없다. 다만 돌고 돌아왔던 인생을 다시 되새김질 해보면 늘 그 자리였다. 태양을 벗어날 수 없는 지구처럼 그도 음악을 떠날 수 없었던 것뿐이다.
“읍내리 2구 출신”이라는 정태국(57) 씨는 ‘신촌블루스’ 창립부터 함께한 드러머였다. 한국 대중음악계의 대표적인 블루스 그룹으로 80~90년대 활동했던 신촌블루스는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밴드다. 이은미·한영애 등 정태국 씨와 함께 활동했던 신촌블루스 출신 보컬들의 이름은 지금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그들의 블루스 음악은 비가 오는 날을 연상케 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빗속에 젖어드는 듯했다. 19세기 말 미국땅으로 강제이주 당한 흑인 노예들의 아픔으로부터 시작된 블루스 음악은 태생이 그러하듯 사회에서 온몸으로 비를 맞고 있는 사람들을 위로했다.
“나 하고 싶은 음악할거야”
십 수 년이 지났어도 ‘신촌블루스’는 정태국 씨를 설명하는 가장 대표적인 수식어다. 한때 ‘잘 나가는’ 그룹의 드러머였던 그도 지금은 나이가 들었다. 돌이켜 보면 지난 삶은 참 고됐다.
고등학교를 다니며 선배들로부터 드럼을 배우기 시작하며 음악을 처음 만났다. 학교를 졸업한 뒤 가족들의 권유에 농업기반공사(현 한국농어촌공사)에 입사했지만 채 1년을 버티지 못했다. 그길로 “나 하고 싶은 음악을 하겠다”며 짐을 싸서 서울로 떠났다. 신촌 어느 한 귀퉁이에서 함께 연주하고 노래하던 사람들이 모여 신촌블루스를 만들어 1986년 4월 첫 공연을 했다.
하지만 위기가 찾아왔고, 팀을 떠나려고도 했지만 운명처럼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난 정통 블루스를 하고 싶었는데, (멤버들하고) 의견이 안 맞기도 했어요. 그게 마음에 안들었고 3집 앨범에 참여하지 않았죠. 부산으로 도망(?)쳤는데, 결국엔 다시 돌아오게 되더라고요.”
떠날 수 없었던 음악
현실적인 어려움도 컸다. 그들이 하던 음악은 ‘돈’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출연료를 떼이기도 하고, 사기를 당하는 등 경제적인 어려움에 부딪힐 때마다 마음엔 생채기가 하나씩 늘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음악을 떠날 수 없었다. 음악을 함으로써 상처받는 날들도 많았지만, 음악 때문에 치유되고, 음악을 통해 위로 받았다.
한국은 예나 지금이나 음악하기에 좋은 여건은 아니지만 그래도 정 씨가 활동했던 때보다는 많이 나아졌단다. 그러나 여전히 가난한 음악가들은 하루하루 삶을 고민해야 하고,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음악을 이어가야 하거나, 포기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정 씨는 “음악에 대한 열정이 없으면 이 길을 가기엔 너무나 힘들다”며 “헤어 나오지 못하는 걸 보면 마약보다 더 무서운 게 음악인 것 같다”고 말했다.
늘 푸른 ‘딴따라’
지난 2003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지역 선후배들과 함께 새로운 음악 인생을 살고 있다. ‘늘푸른악단(단장 이상돈)’에서 드러머로 활동하면서 그들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마다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공연을 선물한다. 또한 ‘사랑과 평화’에서 키보드를 쳤던 이근수 씨가 아산에 살고 있어 그와 함께 종종 연주하기도 한다.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이들의 악기 소리는 녹슬기는 커녕 그의 인생과 지난 세월을 담아 더 깊고 풍부해져 간다.
서울에서 한 시대를 휘젓고 살았던 그는 고향에서의 삶이 다소 따분하기도 하단다. 그러나 정태국 씨는 다시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당진은 아직 문화적 수준이나 기반이 열악한 것은 사실이에요. 음악성 있고 수준 높은 공연을 당진에서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을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