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잠

고수레로 남겨 둔 홍시의 밀린 잠이 붉은 저녁이다

마당을 쓸던 노인이 허리를 굽히자 짧은 옷단 아래로 살짝 드러나는 등골,

그 깊은 계곡까지 노을이 들었다

무너지는 한쪽 벽에 봉창 달빛을 빚어 얽는 거미가

바람이 들지 않도록 거미줄을 암팡지게 엮는다

명아주 이파리 스적거림으로 창문을 단 집

구절초 꽃대로 세운 배흘림기둥에선 풍경風磬 소리가 향긋하다

노인이 굽혔던 허리를 펴면 가을볕이 어리광처럼 달려든다

도돌이표만 있는 가을볕은 노인의 십팔번이다

음정은 새털구름이고 박자는 떨어지는 은행잎,

아무나 풍월로 읊어도 진양조 장단*

지붕엔 말표고무신 한 짝이 노을로 배꼽만 덮고 누워 있다

갈기털 다 빠진 목덜미에 솟대 그림자를 괴고 잠든 말굽은

아직도 따스한 발걸음을 기억하며

지붕에 올라가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긴 한숨을 쉬는 노인의 호흡이 가늘게 떨린다

허공에 써놓은 점자로 되짚어가는 길에도

과속방지턱이 있는지 바람도 잠시 주춤하는 법인데

어느새 성성해진 백발과 그믐달만 뜨는 눈썹

슬하에 노을 닮은 은행나무 한 그루만 달랑 둔 노인의 가계家系

입술에 허옇게 일어나는 각질을 옷소매로 쓱 훔치니

노을이 찍 묻어난다

노인의 등뒤로 달이 뜬다 어쩌면, 오늘밤

은행잎 한꺼번에 다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듯

노을의 끄나풀이 길다

*진양조 장단 : 판소리에서 가장 늦은 박자

작품설명: 어느 늦가을 탱자나무로 만들어진 울타리 안에 무너지는 집이 있었습니다. 그 집을 지나가는 노인의 쓸쓸한 모습을 보고 시상이 떠올라 그려낸 시입니다.

김겨리(본명 김학중) 작가는

△ 홍익대학교 졸업

△ 2002년 문학과 세상 신인상

△ 2015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

△ 현대로템(주)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