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희 대 / 당진읍 계성리 평화빌라
정시에 내리고 타는 사람이 있다. 그렇게 예쁘지도 밉지도 않은 깔끔한 여자가 언제부터인지 눈에 들어와 있었다. 계절따라 입는 옷의 숫자도 알고 있으니 참으로 이상한 일. 빨간우산이며 노란양산도 있으며, 겨울이 되면 뒷굽이 아주 적은 한우가죽으로 만든 자주색 구두도 있다는 사실. 추운 겨울이 세번 지나도록 이 거리에서 버스를 같이 기다렸던 처지이고 보면 그럴만하겠다.
버스가 온다. 그러나 절대 서두르지 않는다. 내가 타야만 올라오는 예절있는 여자였다. 그러나 지금껏 대화 한마디 물어본 적이 없는 나, 침묵으로 일관해온 눈치의 사나이, 그리고 감각으로 느꼈을 그이의 예민한 관찰, 이것이 모두 대화요, 전부인 것이다.
아침 밥투정에 늦고만 어느날, 급히 정류장으로 달려가 보았지만 이미 차는 떠났고 텅빈 거리, 조용한 거리에서 혼자 이쪽을 바라보는 여자가 있었으니 왜 그 버스를 타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을까. 의문이 겹친다. 늦어서 아니면 같이 가려고... 자문자답으로 해석하고 말았다.
세월은 흘러 봄이 왔다. 먼데서 들리는 종다리 울음소리, 비행기 만큼 높이 떠있는 것 같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만물이 생태계의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한치쯤 올라온 무릎아래 살결이 마치 미역줄기 마냥 매끄럽게 내려와 제법 균형을 갖추고 있는 자태가 아름답다. 금잔화색으로 입은 원피스가 더욱 화려해 보인다. 처음보는 옷이다. 자기가 샀나 아니면 외삼촌이 사주었을까. 궁금이 몰려온다. 물어볼까? 사내답지 않게 어떤 사이인데 물어보긴. 소용없는 소리.
그렇다면 나도 해보자. 내일 춘복을 사입고 나타나 보잔 말이다. 월부라도 좋으니 근사하게 일찍 입고 나와 기다리고 있듯이 해보아야겠다. 오늘 퇴근길에 한벌 사 입을 작정으로 내일 의젓한, 그리고 우아한 모습으로 나타나 보이고 말 것이다. 예리한 주름바지에다 연분홍 넥타이, 백구두, 그리고 머릿기름을 바르고... 이만하면 모두가 그까짓 금잔화 원피스는 거리멀다 할 것이다.
일찍이 옷은 인간의 날개라 하지 않았던가. 신언서판에서도 외모를 중시했고 초면부지 상면은 옷차림으로 우선 대접이 후했으니 내복이 어떻든 목욕을 안했든 신체검사장이 아니거늘 누가 알겠는가.
안식구, 애들 야단이다. 오늘 무슨일이 있으냐고 겹쳐 물어온다. 돈이 어디 있어서 그런 좋은 양복을 샀느냐, 얼마냐, 대답은 입안에서 그냥 넘어가려 하고 있는 참이다. 그러는 사이 잽싸게 앞을 가로 막으며 따져보자는 판에 할 수 없이 대답하고 말았다. 월부라고. 얼마? 25만원, 10개월. 이젠 됐지? 귀청이 터져나가는 것 같다.
정신이 있는 사람이냐고 고성이 방안을 흔들고 있다. 역으로 제압하는 수밖에 없다. 왜 이러느냐고 내가 어떤 상황에 몰려있는지 알구나 있어. 잘 될 때까지 기다리라구. 아무래도 좋은 일 때문에 새옷을 입은 것만은 사실이다. 아이들은 이 정도면 무슨 뜻인줄 알아차린 모양이다. 엄마 그만해 두어요. 그러는 사이 시간은 흘러갔고 ‘야! 나 밥먹었나’ ‘안 잡수셨어요’ ‘그럼 빨리 잡수시고 출근해야죠’ ‘아, 그래 한끼 굶어 죽은 사람 없다드라. 건강에도 좋고 다이어튼가 뭔가도 댓새씩은 물만 먹는다면서. 냉장고에 있는 물을 한사발 마시고 나서기로 했다. 오늘 아침은 이것으로 끝.’
혁띠 한칸을 돌려놓고 문밖을 나섰다. 위기의 순간들을 무사히 처리해 나갔고 이젠 버스타는 장소에만 갖다 놓으면 되는 것이다. 걸으면서 좌우 모습을 지켜보고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보기도 했다. 제법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면서 훤히 트인 신작로 승차위치를 확인해 보았다.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원피스의 여인은 보이질 않았다.
기다리는 것은 지루하기 마련이다. 옆사람들의 잔소리가 시끄럽고 가소롭기 짝이 없다. 그러나 나와는 상관없는 일들, 줄 서있는 어깨들의 높이를 보고 아래쪽도 바라본다. 그리고 큰 가슴의 넓이도 눈으로 재어보고 할즈음 버스가 왔다. 내리고 오르는 순서의 작업은 불변의 원칙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야한 치마에 붕어비늘같은 핸드백을 옆구리에 끼고 기다리던 여인의 행동은 급변하고 만 것이다. 점잖은 모든 이의 귀감으로 되었던 그 귀부인의 행동은 광란으로 변하였고 급기야는 줄이 부서지고 노인을 뒤로한 채 잽싸게 오르는 솜씨, 매 발톱같은 무기가 앞을 저으며 계단을 무시하고 단번에 올라서 통로를 향해 달리는 것이다. 자리가 있어 그곳에 앉았고 환기라도 하듯이 유리문을 젖힌다.
잠시 귀부인으로 알았던 주위 모든 이는 말한다. 알았노라고. 수술로 인한 거짓얼굴, 화공약품으로 물들인 인육의 주름, 매춘과 같은 옷과 냄새, 이 모든 것이 덫에 걸린 위험한 모습이 아닌가. 조심이 입을 다물고 고개만 끄덕인다. 눈썹이 그대로 있어 보기 좋았던 그 여인 저만치 거리를 두고 같이 기다렸던 시간들이 무상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금잔화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던 날은 조용한 아침이었는데 미련없이 가버린 사람. 내일부터는 다른 곳에서 출근해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