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2006년 12월 입국했습니다. 목마르게 그리는 자유는 과연 그 언제일지, 착취와 억압의 앞에 가슴을 움켜쥐고 피를 토하면서도 짐승보다 못한 삶을 이어가야 하는지에 대한 갈등과 방황에 우리는 시달렸습니다. 그 때 우리는 한줄기 희망과도 같은 빛을 따라 자유의 땅을 향해 목숨을 걸고 사선을 넘었습니다.

그 누군가는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는 무서운 산을 넘고, 또 그 누군가는 허기진 배를 끌어안고 이름 없는 허허벌판을 건넜습니다. 하나, 둘 소리 없이 쓰러져갈 때, 하늘 길 구름 속 을 날아 대한민국에 왔습니다. 새로운 세상에서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라고, 자신들을 새터민이라고 불러주는 따뜻한 내 나라 대한민국으로 말입니다.

애국가가 장엄하게 울려 퍼지고 하늘엔 태국기가 휘날렸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목 메여가며 눈물을 쏟던 그날을 잊지 못합니다. 그때 누군가 한 명이 “이제는 살았습니다”, “살 수 있습니다”, “꼭 잘 살 것 입니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사회를 경험 한 적 없는 우리에게 이 세상을 살아가기란 생각보다 그리 녹록지 않았습니다. 일을 하면서도 수많은 일에 부딪히며 우리 존재 자체에 대한 인정보다는 다르다는 느낌으로, 공정하지 못하고 그저 불합리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우리는 생각했습니다. 왜냐면 언어 소통에서 느끼는 위축감, 이질감은 사람들과 외면하게 만들고 자신의 가치와 능력을 높이 평가하지 못하고 심리적인 거리감에 갇혀 자신 스스로를 소외시킨 외로운 이방인이 아닌 이방인이라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 때 한 사람이 손을 내밀었습니다. “담당입니다. 당진경찰서 이지용입니다”라는 말을 하면서요. 그날부터였습니다. 이지용 경사는 작고 사소한 것에 이탈주민을 위해서라면 묵묵히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그가 있었기에 이탈주민의 얼굴에 넘치는 오늘의 밝은 웃음이 있는 것입니다.

의지할 곳 없이 혈혈단신 외로운 우리를 위해 가족이 됐습니다. 한 이탈주민 아내 이  씨가 출산하던 그날에도 이지용 경사는 병원을 찾았습니다. 두 손에 아기배냇저고리와 분유, 기저귀를 들고요. 우리를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아쉬운 소리를 들어가며 부탁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한 명 한 명 놓치지 않고 챙겨주십니다.

이탈주민 박 씨의 이야기 또한 진한 향기를 풍기는 이야기 중에 하나입니다. 그는 한 가정을 돌보며 가장 역할을 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는 회사로 빨리 돌아가야 하는데 아이의 입학 수속을 밟지 못하고 시간이 촉박해 발을 동동 굴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이지용 경사는 박 씨의 어린 아들의 손을 잡았습니다. 직접 입학에 필요한 서류를 챙기고 절차를 밟아 수속을 끝마치고 입학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축하까지 해 줬습니다.

하나원을 갓 퇴소해 당진에 새로운 삶의 보금자리를 만드는 북한 이탈주민에게는 혼자서 해결하지 못 할 일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지용 경사는 새로 당진에 이사 오는 이탈주민들이 임대주택에 들어올 때면 항상 두루마리 휴지를 비롯해 커피믹스 등 각종 생필품을 가득 안고 우리를 찾습니다.

사소한 것에도 서툰 이탈주민을 위해 공유기를 달고 컴퓨터를 들여봐 줍니다. 그의 능력과 보살핌은 어디까지일까요. 우리 당진에 거주하는 이탈주민에게는 참으로 복입니다.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누며 우리의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어 준 사람, 그는 우리에게 등대이자 그 등대를 밝혀주는 등대지기입니다.

이지용 경사님, 감사합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헌신하시는 당신 같은 경찰관이 있기에 우리 이탈주민들도 이 땅, 당진을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하고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