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간의 야유회>를 보고
한번의 인생을 더 산 너희는 복된 애들
연극이 끝나고 거리로 나오니 벌써 어둑어둑해지는 시간, 저녁 6시였다. 집에서 엄마를, 아니 어쩌면 저녁식사를 기다리고 있을 애물단지 같은 두아들 생각에 걸음을 재촉했지만 마음은 낮도깨비처럼 뒷덜미를 잡아당기며 그냥 그곳에 있었다.
아마 지금쯤 배우들은 말할 수 없이 벅찬 감회에 젖어 차마 진정을 되찾지 못하고 있으리라. 객석에 남은 관객들 역시 극중상황에서 다 빠져나오지 못한 채 엉거주춤 자리를 추스리고 있을테고.
‘연극이 끝난뒤’... 그 가벼움으로 털고 일어서는 주변 공기의 진중함을 나는 단 한번도 제대로 맛보지 못했다. ‘인생은 한바탕 연극무대’라고 말한 세익스피어가 죽기 직전 ‘자, 이것으로 나의 연극무대는 막을 내리니 그대 관객들이여! 나에게 박수를...’이라고 말했다지만 인생이 연극이라고 확신하지도 못하는 나로서는 그 상황에서나마 그런 감회를 갖지 못할 것 같다.
토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신세대 가수들처럼 차려입은 10대들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옷차림에 머리치장에 적지않은 공을 들인 그네들의 모습에 문득 공허한 기색이 역력해 보이는 건 속이 꽉차 보이던 공연장 안의 아이들 때문이었던 것 같다.
똑같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을 이토록 다른 장소, 다른 내용으로 그려질 수 있다니. 그러고 보면 모든 사람은 배우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 대본을 각색해가며 연출하는 종합예술가인지도 모른다.(최초의 대본에 관한 일은 우리 각자의 의지를 초월한 미지의 영역에 여지를 남겨두자)
‘어쨌든 얼마나 복된 아이들인가’ 어른도, 아이도 까닭없이 분주하고 복잡한 이 세상에 두시간반이라는 긴 시간을 다른 세상, 다른 사람 속에 들어가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 여름방학부터 거의 한학기 내내 찬 저녁도시락 까먹으며 함께 울고 웃으며 열정을 나눌 수 있는 선생님과 그런 동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오늘날 학교가 차디찬 독방 같지만은 않다는 것이.
“우리 어머니는 입원할 계약금이 없어서 병원 문턱 한번 밟아보지 못하고 죽었단 말이오”라고 울부짖은 죄수와 의사 오박사. “그렇게 배가 고프면 훔치시오. 하지만 들키지 마시오. 그렇지 않으면 바로 나와 같이 될 것이오”라고 쐐기를 박던 또다른 죄수와 무인도에서의 배고픔을 못이겨 룰(rule)을 깨고 음식을 훔친 저명인사 안중팔. “이 도난사건과 겁탈미수사건을 내가 책임지겠소. 자, 내가 고꾸라질 때까지 나를 때려! 안 때리면 네가 죽어!”라며 무책임한 정치인을 풍자하듯 매맞는 대장, 죄수 99번(그는 무인도에 표류한 죄수와 저명인사의 새로운 지도자로 ‘주석’이라 불렀다.)
그를 때린 죄수와 그 용서의 광경을 목격하는 모든 배우들이, 그 학생들이 사회에 나가 돈에 의술을 파는 이기적인 의사가 될 수 있을까. 모든 죄수를 인격적으로 비하하며 사회적 인기확보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다거나 책임질줄 모르는 악덕 정치인이 된다고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이 이런 여과 체험을 통해 세상의 불순한 단면을 한번 거르고 지나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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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삼씨가 썼다는 원작 를 읽은 적이 없어서 그런지 ‘사회명사 6명이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와 인기확보를 위해 죄수들과 함께 야유회를 떠났다가 폭풍우 속에 무인도에 도착한다’는 상황설정에 관객들과 쉽게 호흡을 같이 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난 정말 열심히 보았다.
좀더 압축하고, 좀더 강렬하게 표현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부분부분 있었지만 학생들이 대견하다는 생각에 비하면 대수롭지 않았다. 그중 몇몇은 기성배우와 같은 노련함과 짙은 개성마저 엿보였다.
30일간의 절망적인 기다림 끝에 구조선이 도착했을 때 다시 약삭빠르고 거만하게 돌변하는 저명인사들. 인격이하로 비하되는 격리된 세상으로 다시 움츠러 들어가야 하는 죄수들. 이 차디찬 현실과 거리감 앞에 소리치며 울부짖는 신신옥(그녀는 저명인사 고여사의 죽은 아들의 애인으로 고아로 자랐다. 대학생 출신 죄수 5번과 무인도에서의 비극적인 사랑과 결혼을 한다. 구조선이 닿은 것은 그들이 신방에 들기 직전이었다.)은 그 거리를 잇는 가느다란 한줄기 빛과 같았다.
“이게 꿈이라고요? 그래요! 꿈이예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꿈이라구요.” 그녀의 울부짖음으로 막이 내렸다. 조건을 떠나 한 인간이 한 인간을 영혼 깊숙이 만나는 순간만큼 아름다운 건 없다는 걸 우리가 다시 느낄 수 있다면.
연극이 끝났다는 신호로 군민회관에 불이 다 들어왔을 때 유감스럽게도 객석에는 어른이 너무 적었다. 아마도 학생연극의 첫나들이인 탓이리라. 내년에 더 많은 어른 관객이 이 묘미를 맛볼 수 있기를 바라며 ‘내 아들도 연극해보면 참 좋겠다’는 때이른 생각이 들었다. 음향, 소품, 분장, 조명을 담당한 스텝들에게도 찬사가 골고루 제대로 돌아갔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