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천지를 보았다. 그것은 신비와 두려움이었다

고국땅을 놔두고 중국에서 살아가는 연변자치주의 조선족 2쪾3세

민족이라는 것, 역사라는 것은 이토록 생생한 것인가

8월 11일 첫째날

당진시대 임직원 가족 21명은 신세계여행사와 함께 3박4일 백두산 기행길에 올랐다. 우리는 중국 심양을 거쳐 연길, 용정, 이어 백두산에 올랐다.

비행기가 중국의 관문 ‘심양’에 도착한 것은 출발 1시간 40분만인 11일 오후 2시30분. 중국 현지시각으로 1시30분이었다.

상해, 북경, 천진에 이어 중국의 4대 산업도시인 ‘심양’은 유동인구 포함 7백만 인구가 사는 곳으로 러시아, 일본, 서울, 홍콩으로 이어지는 국제공항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무질서 속의 질서 - 중국의 저력

자전거가 유난히 많은 심양은 중국인의 주된 교통수단이 바로 자전거임을 실감나게 했다. 심양의 자전거수는 390만대. 7백만 인구중 한가정에 두 대꼴로 자전거가 있는 셈이다. 따라서 도심의 도로 모습 역시 우리와 크게 달랐다. 양쪽으로 인도가 있고 그 안쪽에 역시 양쪽으로 2차선 규모의 넓은 자전거 도로가 있으며 양쪽으로 가로수가 잘 정비되어 있고 한가운데에 차도가 있다.

희한한 것은 2차선, 4차선 차도를 막론하고 중앙선이 없다는 것이다. 어디서나 추월과 회전이 가능했다. 더욱 신기한 것은 이런 아슬아슬한 곡예가 계속되는데도 교통사고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무질서속에 도사린 그들의 ‘질서’란 도대체 무엇일까. 어쨌든 강제규범만이 질서를 유지하는 최선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을 통해 배울 수 있었다.

조상의 것은 털끝 하나도 손대지 않는 중국인의 문화를 보여주는 청태종의 묘 「북릉공원」을 돌아본 뒤 연길로 향했다.

안내원은 “심양은 여성이 살기 좋은 곳”이라고 결론 내렸다. 왜냐하면 퇴근길 남성들의 자전거앞 짐바구니 속에는 시장에서 산 찬거리들이나 탁아소에서 데리고 온 자녀들이 태워져 있기 일쑤이며, 저녁식사후 설거지까지 모두 남성의 몫이라는 것이다. 맞벌이가 통례인 이곳에서는 모성보호라는 면에서 가사노동의 상당부분이 남성의 몫이다.

이러한 기조는 다민족국가인 중국사회에서 ‘소수민족보호’라는 약자우선의 정책에서도 나타난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는 중국정부가 소수민족을 위해 시행하는 ‘자치주’정책에 의해 생겨난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중심도시다. 중국 전체를 5대 「성」(우리나라 행정구역 ‘도’보다 훨씬 광역단위)으로 나눌 때 연변자치주는 길림성에 속한다. 그러니까 연길시를 우리나라 행정구역상으로 나타내면 「중화인민공화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가 된다.

중국에 사는 조선족은 총 2백13만명으로 그중 연변자치주에 85만명이 집중적으로 모여 살고 있다. 그렇다고 조선족 자치주안에 한국인만 사는 것은 아니다. 중국인, 한국인, 몽고족, 위그로족등 24개 민족이 살고 있으며 그중 중국인이 55%, 한국인이 41%를 차지한다.

연변의 중심도시 연길시는 인구 33만명중 우리민족이 60%를 차지하고 있는 곳이다.

연길시에서 보게 되는 특징은 첫째, 이중국어로 쓰여진 간판이다. 연길시의 모든 간판은 위에 한글, 아래에 한자로 쓰여져 있다. 또 하나는 초중고 학교마다 우리말로 강의하고 교사도 모두 한국인이라는 점이다. 남한의 영향으로 노래방도 급격히 늘어 연길시에만도 250개가 된다.

8월 12일 둘째날

무궁무진한 농사 손으로 직접

연길에서 하룻밤을 묵고 우리는 12일 새벽 백두산을 향해 떠났다.

연길시를 출발해 백두산 입구까지는 버스로 5시간이 걸렸다. 백두산의 위치는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안도현. 백두산까지 가는 동안 일행은 연길시를 거쳐 용정시, 화룡시 등을 지났다.

길림에 이어졌다 하여 ‘연길’이라 부르는 이 도시에는 관광객이 많아지면서 호텔이 13개로 늘었으며 남한의 기업이 많이 진출해 있다. 예로부터 ‘술을 이고는 못가도 마시고는 갈만큼’ 술을 좋아하는 탓인지 최근 부진한 경기속에서도 맥주공장만은 가동이 잘되고 월급도 꼬박꼬박 나온다고 한다.

일행은 우리노래 「선구자」에 나오는 익숙한 지명들을 만나게 되었다. 연변에서 세번째로 크다는 세전평원에 해란강이 흐리고 있었다.

길 양쪽으로 15km나 이어지는 ‘사과배’나무 과수원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중국은 농업의 기계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아직도 일일이 손으로 농사를 짓고 있었지만 노는 땅 하나없이 논밭경작이 정갈하게 되어 있었다. ‘기계화되면 이 많은 인구가 할 일이 없어진다’는 가이드의 말은 기계화가 급진전된 서방사회가 ‘실업난’이라는 최대의 사회문제를 안고 있는 것과 대조를 이루며 묘한 여운을 남겼다.

‘생산성 향상과 경쟁력 강화’라는 명목으로 다른 한편으로 실업자를 대량으로 양산하고 있는 영국, 프랑스, 독일등 유럽 선진국에서 「신사회주의 르네상스」가 새롭게 일고 있다는 최근의 소식은 생산성 향상 못지않게 실업해소가 중요한 과제라는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용정 - 해란강과 일송정

용정시는 우리민족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곳으로 시민 27만5천명중 조선족이 70%를 차지한다. 또한 중국에 사는 전체 조선족 중에서도 1/4이 이곳에 살고 있다. 과거 두만강을 건넌 조선인들이 가장 먼저 짐보따리를 풀어놓은 곳도 바로 이곳이다.

왼쪽으로 「일송정」이 보였다. 지금은 산꼭대기에 소나무같은 정자가 하나 서있는데 1930년까지 이곳에는 원래 정자처럼 보이는 소나무가 우뚝 서 있었다. 그 모습이 멀리서 보면 마치 호랑이처럼 보였다는데 용정에 유난히 많았던 독립투사들은 이 일송정에 모여 회합을 갖곤 했다.

일제는 독립운동의 상징적인 근거지가 된 이 소나무를 없애려고 수차 시도한 끝에 한밤중에 소나무에다 구멍을 뚫어 후추가루를 넣었다는데 3개월 후 말라죽은 소나무는 아무리 회생시키려 해도, 심지어 새나무를 심어도 얼마간 자란 후에는 모두 말라죽고 말았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정자만 남아있는 것이다.

용정에는 초가집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비록 살지않더라도 전에 조상들이 살던 집을 부수지 않고 옆에다 집을 짓고 산다고 한다.

낮12시 백두산 아래 첫마을 이도백하에 이르러 식사를 마치고 드디어 백두산으로 접어들었다.

백두산 - 우리민족의 성산

백두산은 세계 유네스코가 정한 좧자연환경보호지구좩로 살아있는 자연식물관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도 이곳에서 나뭇가지 하나 꺾을 수 없으며 심지어 떨어진 썩은 나무조차도 갖고 나갈 수 없다. 해발 2,744m에 이르는 동안 우리는 대자연이 만들어 놓은 경관이 주는 감동과 두려움으로부터 헤어날 수 없었다.

해발 1,200m부터 시작된 침수림대. 좁은 길 양편에 10m 키로 쭉쭉 뻗은 나무들을 보노라니 어느새 더위는 한풀 꺾이고 나무들이 내뿜는 서늘한 공기에 빨려들어갔다. 이 수풀 속에서는 꺾이거나 죽은 나무들이 고스란히 썩어 밟으면 발목까지 덮힌다고 한다. 이 사이에는 낙엽송과 홍송, 백송, 그리고 백양나무가 수종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는 백두산의 16개 봉우리(중국쪽 6개, 북한쪽 7개, 접경지 3개)중 2,670m 높이의 천문봉에서 천지를 바라보기로 하고 너무도 설레는 마음으로 수풀속을 달렸다.

날씨는 맑았다. 그런데 백두산 입구를 지척에 두고 일행은 두차례나 거센 소나기를 만났다. 맑고 흐리기를 거듭하자 잠깐 사이에 엄청난 희비가 엇갈렸다. 웬만해서는 천지를 보기 힘들 것이라는 불안한 사전정보를 줏어듣고 오긴 했지만 혹시 이러다 정말로 천지의 장관을 못보고 가는 게 아닐까 노심초사했다.

고도가 높아 날씨변화가 심하고, 많을 경우 하루 열세번까지 비가 내린다는 백두산. 그 괴팍하고 까다로운 성미가 민족의 영산다운 위세다와보여 내리는 비가 밉지만은 않았다.

장백산(중국에서는 백두산을 장백산이라 부름) 천지입구에 내리자 다시 한차례 소나기가 휩쓸고 지나갔다. 비를 피해 숙소에 짐부터 풀고 우리는 장백폭포를 먼저 보고 천지에 오르기로 했다.

장백폭포로 가는 길은 그 또한 장관이었다. 혹시 미국의 그랜드캐년이 이런 자태일까. 사방으로 장엄하게 버티고 선 산세가 이제껏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동을 자아냈다.

올라가다보니 자연 온천수가 흘러 김이 모락모락 나는 데가 있었다. 지표 밑에서 뜨거워진 물(평균온도 60~70도, 최고온도 82도)이 솟아나는 것이다. 영화에서나 보았던 화산폭발 장면과 그 위를 스멀스멀 기어내려오는 뜨거운 용암이 연상되었다. 지금 솟아나는 뜨거운 물은 지표밑에서 그 열로 데워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백두산은 1597년과 1688년, 그리고 1702년에 걸쳐 세차례 폭발했다. 그 뒤로 아직 폭발한 적이 없기 때문에 사화산(죽은 화산)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뜨거운 온천수는 백두산 천지가 ‘살아있으면서 잠시 쉬고 있는’ 휴화산이라는 징표다. 온천수가 고인 조그만 바위구덩이에서 상인들이 온천수로 쪄진 계란을 팔고 있었다.

고도가 높아지자 휘어진 백양나무는 사라지고 두꺼운 이끼가 산의 표면을 덮고 있었다. 두견화라고 불리는 노란야생화와 흰색, 분홍색의 야생꽃들이 피어있었다.

한 30분을 걸으니 위세도 당당한 폭포가 물안개를 뿜으며 떨어지고 있었다. 저 물이 흐르고 흘러 동해에 이른다는 안내원의 말은 북한을 넘어온 이곳 중국땅에서야 남북의 가까운 거리와 한몸이라는 사실에 진저리를 치게 했다.

폭포 오른쪽으로는 걸어서 백두산 천지에 오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개미처럼 까마득히 능선을 이루고 있었다.

천지 - 복받치는 민족애

폭포를 내려와 우리는 꿈에도 그리던 백두산 천지에 올랐다. 천지입구에서 일본식 도요다 짚차를 타고 아슬아슬하고 가파른 능선을 지그재그로 한참을 달렸다. 옆으로 까마득한 절벽이면서도 그 밑에는 또 아름드리 구릉이 구불구불 끝없이 이어지고 위로 옆으로 또다시 웅대한 산자락이 멀찌기 버티고 선 백두산 천지주변은 백두산의 전체 모습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어림짐작조차 할 수 없게 했다.

이 대단한 백두산의 위용을 보지 못하고 자란 우리들이 스스로 얼마나 우리국토가 좁고 우리민족의 심성조차 좁다고 우리를 낮게 평가해왔는지 원망스러웠다. 만일 이러한 장관을 우리가 보고 자랄 수 있었다면 우리는 얼마나 우리자신과 우리민족에 대한 자부심을 가졌겠으며, 우리가 얼마나 웅대한 꿈을 갖고 세계에 대한 도전의식을 키울 수 있었을 것인가.

백두산 최고지를 불과 몇백m 남겨두고 짚차에서 내려 우리는 마지막 능선을 걸어올랐다. 꼭대기는 생명이 자라지 않는 화산재에 덮여 있었다. 흘러내릴 듯 가파른 흙과 자잘한 돌길을 걸어 드디어 백두산 천지. 눈앞에 펼쳐진 장관을 우리는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북한쪽인 왼쪽으로 2,749m(중국기록은 2,749m, 한국기록은 2,744m)의 높이를 자랑하는 백두봉(장군봉이 솟아있고 오른쪽에는 중국쪽으로 가장 높은 백운봉(2,691m)이 구름에 살짝 덮여있었다. 그 안에 현존하는 물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코발트빛의 꿈결같은 물이 차갑디 차갑게 고여있는 것이었다.

백두산의 최고높이가 2,749m이고, 이 천지의 수면높이가 대략 2,155m라고 하니 이 봉우리에서 수면까지 가려면 가파른 능선을 거꾸로 타고 6백m를 내려가야 하는 것이다. 천지의 평균수심은 204m, 가장 깊은 수심은 373m로 감히 그 깊이를 알 수가 없다. 이 신비스럽고 광활한 호수를 보지 않은 사람이 어찌 말할 수 있으랴 싶었다.

최근까지도 괴물이 산다는 설이 나도는 ‘천지’는 산의 웅장함 뿐 아니라 바로 이 신비로움과 두려우리만치 차디찬 느낌 때문에 더욱 영산ㆍ성산이라는 이름에 걸맞아 보였다.

챙겨입은 긴옷과 잠바사이로 추위가 파고드는 천지앞에서 우리는 이곳이 우리땅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면서도 지척에 두고도 머나먼 중국대륙을 거쳐 왔다는 사실에 코끝이 시렸다. 30분이라는 짧은 시간, 마치 만나서는 안될 연인을 비밀리에 만나고 돌아오는 사람들처럼 우리는 아쉬움과 서글픔을 안고 산을 내려왔다.

그 밤 모두 눈앞에 어른거리는 천지를 지우지 못해 잠을 뒤척였을 것이다.

8월 13일 셋째날

용정중학교와 시인 윤동주

셋째날 우리는 아침일찍부터 5시간을 달려 다시 용정시로 되돌아왔다. 이곳에 있는 조선족학교 용정중학교에 들르기 위해서였다. 학생 2,300명의 이 학교에는 2층 건물의 「대성중학 옛터」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으며 그 안에는 유물전시관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일제시대 만주로 건너온 우리민족의 개척지 용정의 모습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해란강의 마을, 용두레 우물(용정)이 있던 마을, 민족의식이 살아 넘치던 곳이었다.(선구자 노래 1, 2절에 나오는 지명)

시인 윤동주의 영정과 문익환 목사와 함께 찍은 윤시인의 사진은 그중 낯익었다. 이 학교 젊은 여선생님은 지나간 역사와 함께 윤동주 시인이 감옥에서 생체실험중 1945년 2월 16일 숨졌다고 덧붙였다.

우리의 민족학교 용정중학교는 조선족학교였던 대성중학교와 광명중학, 광명여중, 동흥중학, 명신여중, 은진중학등 6개 학교를 합쳐 1946년 「길림성 룡정중학」으로 개칭되었다.

한서린 강 두만강

이날 오후4시 우리는 도문시로 향했다. 도문강(두만강)을 보기 위해서였다. 시라고 해봐야 인구 1~2천명의 작은 도시지만 북한과 접경지역이라고 비중있게 시라는 이름을 붙였다. ‘도문역’. 최근 북한의 식량난을 돕기위해 모은 남한과 세계 각국의 지원식량이 이 역을 통해 북한으로 들어갔다.

조선인의 숨결과 함께 흐르는 연변의 4대강(두만강, 부르하통하, 가야하, 해란강)중 나머지 세강줄기를 모아 흐르는 가장 큰 강 두만강. 150km만 더 흐르면 동해로 가는 이 강은 애처롭게도 강의 몸뚱이를 둘로 나눠 한쪽은 북한, 한쪽은 중국강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강을 가로지르는 「도문다리」는 국경선을 따라 반으로 나뉘어 있었다. 북한쪽은 하늘색, 중국쪽은 분홍색으로 다리 색깔도 다르게 칠해져 있었다. 북한사람들과 중국사람들은 이 다리위 경계선까지 가서 서로 만날 수도 있다. 그러나 남한사람은 안된다. 우리는 다리 멀리서 다리와 두만강 물을 바라보았다. 바로 강 건너는 함경북도 남양시. 비록 수풀에 가려져 있었지만 낮은 아파트들과 건물들이 보일 정도로 가까웠다.

백두산 관광 2~3일째 안내를 맡았던 조선족 젊은 안내원은 “하루빨리 통일될 수 있도록 남한사회에서 많이 성원해달라”는 가슴아픈 말을 남겼다.

고국땅을 놔두고 중국에서 살아가는 연변자치주의 조선족 2, 3세들. 그들이 바라볼 때 남북으로 나뉜 조국의 모습을 얼마나 쓰라릴 것인가. 돌아오는 차안에서 ‘눈물젖은 두만강’을 불러도 눈물 한점 흘리지 않는 우리의 잊혀져버린 민족의식은 그들을 또 얼마나 가슴아프게 했을 것인가.

광복의 달 8월을 맞아 떠난 ‘백두산 기행’은 민족이라는 것, 혹은 역사라는 것이 이토록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것을 가르쳐준 소중한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