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만 할아버지

대합덕리 이치만 할아버지

젖동냥으로 이은 8십년 질긴 인생

역사의 어느 여울목을 따로 짚어볼 나위도 없이 비바람에 먹구름이 떠돌며 어지럽던 시절, 많은 기쁨과 슬픔의 이끼가 깔려있다. 기록에도 실려있지 않은 들녁에는 개울목을 끼고 이쪽 저쪽 얼룩진 눈물자국이나 웃음소리를 세월과 함께 길 섶에 묻어버린 것들이야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예산땅 가야산의 원효봉을 중심으로 덕산과 고덕의 삼각형의 꼭지점이 되는 곳이라 하여 대합덕리라 하였던가? 대합덕리의 넓고 넓은 뜰에는 병인년(1846년) 대교난에 무고한 많은 천주교도들이 옥에 갇혀 굶어죽고 볼기맞아 죽고, 또한 땅속에 수백명씩 생매장을 당하는 큰 참사가 가야산 서쪽의 해미감영에서 행해졌는데 그많은 사람들 태반이 이곳에서 살고있던 우리네 선조들이었다. 이 역사의 고장 대합덕리의 덕곡부락에 살고 계시는 이치만 할아버지의 내력을 더듬어 본다.

이치만 할아버지는 금년 연세 81세에 혼자 살고 계신다. 원래 청양땅 화성 산골에서 태어났는데 화성땅은 천주교의 두번째 신부 최양업이 출생한 고장이다. 이치만 할아버지는 출생하자 양친부모가 다 세상을 떠나시어 심청이가 젖동냥으로 성장하였듯이 동네 부인들의 젖동냥으로 목숨을 부지하며 살았으므로 부모의 얼굴을 알 수가 없을 뿐더러 그옛날 산골마을에서 사진 한장 남겼을 리 없다.

철이 들면서 지게지고 산에서 땔감을 해다가 이집 저집 부려놓고 밥을 얻어먹고 살고 있었다. 이치만씨가 25세때까지 부모없이 고아로 자라면서 남의 집의 머슴살이 하는 주제임으로 장가를 못들고 노총각으로 지내다가 이웃집의 중매로 15살의 신부를 맞이하여 신첩살림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산골에서 살기가 어려워 개나리봇짐을 지고 이틀이나 걸어서 도착한 곳이 대합덕리 덕곡마을이었다. 이곳에서 다 쓰러져 가는 단칸방의 움막집을 쌀 두말주고 사서 본격적으로 가정을 꾸리면서 노동품팔이를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들의 어버이들이 다 그러하듯이 이치만 할아버지도 일제의 학정에 시달리면서 땅 한뼘도 없이 몸으로 죽기를 작정, 흙과 싸우며 땀으로 얼룩진 세월을 보내왔다. 오늘이 어제같고 내일이또 내일인 변함없는 고된 삶으로 세월을 좀먹고 살았다.

여행이라도 자주 하였느냐고 물으니 6.25전쟁 당시 보국대로 철원에 가서 군인들의 밥과 탄약을 등에 지고 산으로 져다주기를 1년반 한 것이 집을 떠난 객지 생활의 전부라고 한다. 외골수 인생, 우리들 농촌의 모든 부모들의 표본이 아니겠는가?

머슴살이, 소작농 생활을 하면서 어렵게 살고 있었으나 결혼생활 20년이 지나도 자식을 얻지 못하여 조카를 양자로 들여놓고 살았다. 화승이(양자이름)가 어려서 재롱을 떨고 국민학교 다닐때는 가난하지만 집안에 웃음 꽃이 피어 살아가는 데 신바람이 났다고 한다.

변함없는 삶을 살다가 지금의 집으로 이사온 것은 5년전에 쌀 몇가마 주고 사왔다. 움막집에서 55년을 살았는데 그 집에 비하면 대궐같은 집이 아닐수 없다. 방 한칸에 부엌이 있고 대문이 따로 있고 작은 앞마당이랑 툇마루까지 갖춘 어엿한 집이다.

그래서 많은 돈은 없었지만 여생을 그럭저럭 살만큼 준비하였는데 부인 장씨가 병석에 누웠다. 천안, 서울등 큰 병원으로 다니면서 부인의 병을 고쳐보려고 노력은 하였지만 위암이 만성이 돼서 1년여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것이 3년전의 일이다. 부인의 치료비와 교통비로 모아두었던 돈은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지금은 서울에서 회사택시기사로 일하는 양아들의 도움으로 겨우겨우 살아가신다. 호적상 아들이 입적되어 있음으로 거택보호의 혜택도 못받고 살아가신다. 즐겨하는 술도 아끼고 아끼면서 며칠에 한잔씩 마시면서 시름과 고독을 달래면서 살아가신다고 말씀하시는데 기운이 없어보인다. 술한잔을 드시면 그날은 아무것도 먹지않고 잠을 잔다고 알려주신다.

기자와 인터뷰하는 날은 대낮부터 냉방을 몸으로 데우면서 누어 계셨다. 왜 노인정에 안 나가셨냐고 하니 노인정에 가면 남의 술만 얻어먹어서 미안하여 못가셨다고 한다. 비록 가난하고 외롭게 살고 계시지만 남에게 신세를 지지않고 살아가겠다는 굳은 의지를 갖고 계신 것이다.

이치만 할아버지의 집을 나서면서 내자리를 생각해 본다. 가난하고 외로운 노인들에게 도움을 드리고져 글을 쓰고 또 은인들과의 연결고리를 만들어드릴 의도로 시작을 하였지만 헨리뉴엔이 쓴 「새벽으로 가는 길」의 한구절이 자꾸자꾸 머리에 떠올라 여기에 적어본다.

“가난한 분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또 돈을 전하고져 하면 먼저 나자신이 더 없이 가난해지지 않으면 안된다. 결코 호기심을

품지도, 야심을 갖지도, 젠체하거나 오만하지도 않아야 한다. 내가 있어야 할 유일한 자리는 가난의 자리. 고독과 분노와 혼란과 좌절과 고통이 있는 그 자리이다.”

이치만 할아버지에게 따뜻한 온정을 주실분은 연락주십시요.

서금구/당진시대 객원기자

합덕대건노인대학장

(0457)363-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