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젠가 우체국장이 되리라던 꿈
20년만에 이룬 어느 집배원
석문우체국장 최장옥씨
그가 가진 또하나의 꿈 ‘인간적인 시민사회’
고대면 슬항리 촌구석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결혼하자마자 터진 한국전쟁에 나가 3년이라는 전쟁기간을 꼬박 채우고 돌아오셨다. 그 바람에 결혼 4년만에 태어난 이 아이는 마치 대한민국 정전(停戰)기념으로 태어난 것만 같았다. 1954년의 일이다.
해가 길어지면 점심 한끼가 늘었기 때문에 해짧은 겨울을 은근히 기다렸던 어른들. “오늘은 해도 다 저물었으니께 점슴 대신 저녁이나 언능 해먹고 일찍들 자자”하셨다. 그러면 일찍 저녁을 챙겨먹은 배가 꺼지기 전에 얼른 이불속으로 기어드는 게 상책이었다. 해가 길어진다고 먹을 것이 많은 건 아니었다. 그때의 점심이란 고구마가 고작이었다. 이 역시 전쟁이 남긴 빈곤 위에서 기념물같은 삶을 살아온 한 세대의 이야기다.
이런 무대 위에서 힘껏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했던 것이 있었다. 넉넉한 먹을거리? 입을거리? 아니다. 그런 것은 애당초 없었다. 없어도 먹을 수 있는 것, 그건 바로 꿈이었다. 비록 배불리 먹을 수는 없어도 꿈을 먹고 사는 자는 주림을 이길 수 있었다. 꿈은 하나의 도전장이고 그 방향 밖으로 나동그라지지 않도록 지탱해주는 링이었다. ‘신화’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그것이야말로 인간을 현실에서 승격시켜주는 힘이었다. 신화는 아직도 그러하다.
석문우체국장 최장옥(48세)씨는 오래도록 이 계통에서 일해온 사람이다. 아니, 오로지 이 계통에서만 일해온 사람이다. 코밑에 부숭부숭 잔털이 나던 스무살 때 우체국에 첫발을 디뎌 벌써 27년이니 그의 잔뼈는 모두 그 일을 하며 굵은 셈이다. 그의 뼈마디들도 다 할 말이 있을 것만 같다.
여섯명이 오밀조밀 일하는 석문우체국. 국장실도 따로 없어 사무실은 더 가족같은 분위기다. 천의우체국 근무를 마지막으로 97년 우체국장에 올랐으니 그도 벌써 4년째. 직원들에게 지시도 하고 업무를 챙겨주기도 하는 최 우체국장. 새로운 자리라고는 하나 그에게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다. 모두 그 자신이 한걸음씩 밟아서 지나온 길이기 때문이다.
1973년. 5남매의 장남으로 부족한 집안의 일손을 도와야 했던 최장옥은 고교진학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왔다. 10대 후반에 잠시 태권도사범을 지내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잠시였다. 그의 진짜 사회생활은 스물되던 해 고대우체국에 입사하면서 부터였다.
우편배달부 일은 고되었다. 핸드폰에 이메일에 눈만 뜨고 손만 까딱하면 서로에게 가 닿을 수 있는 요즘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때 사람들은 ‘전보’에 의지해서 살았다. 일상소식 뿐만 아니라 다급한 기별이나 업체들의 거래도 대부분 전보에 의존하고 있었다. 전화가 있었다고는 해도 리·동단위 유지네 집에 하나 있을동 말동 했다. 전보배달을 맡아서 했던 입사직후 5~6개월이 가장 힘들었다.
“그날 도착해야 할 전보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그날 전해줘야 했으니까요. 내용을 보아하니 언제까지 소금 몇킬로를 납품하라는 내용인데 전보가 하루 늦으면 그 사람에게 무슨 변이 있을 줄 어떻게 알아요? 어떤 날은 그러다 보면 자정이 다 되곤 했죠.”
요즘처럼 교통수단이 좋기를 한가. 자전거를 타고 이 산골 저 산골 헤매다 보면 눈이 많이 내린 밤에 자전거 바퀴가 구르지 않아서 애를 먹는가 하면 도랑에 굴러떨어지기도 하고 여름에는 막 빨래를 한 듯이 땀으로 젖은 옷을 입고 다니다가 저녁이면 소금기가 말라 허옇게 떨어지곤 했다.
지금와서 다시 하라면 못할 것 같은 그런 일들을 젊은 날에는 어찌 그리도 억척같이 했는지 모르겠다. 사람의 인내심이 어느 정도인지 최장옥 국장은 그때를 떠올려보면 짐작이 간다.
노력도 했지만 그에게는 늘 자신을 독려하는 꿈이 있었다. 그렇게 한발 한발 고생길을 걸어 이르고 싶은 지표가 있었다. 그것은 나도 언젠가 우체국장이 될 것이라는 꿈이었다. 20년 넘게 집배원 생활을 하면서 그는 그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얼 계산한 것도 아니었다. 23년이 흐른 뒤 거짓말처럼 기회가 주어졌고 그는 그의 꿈대로 우체국장이 되었다.
뿐만 아니다. 그는 동생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그만두었던 공부를 마흔을 코앞에 둔 나이에 뒤늦게 시작, 고학으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졸업했다. 부인 원복희(45세)씨는 ‘밤낮 책을 달고 다니는 사람’이라고 남편을 지칭한다.
꿈을 지니고 그 꿈을 향해 전진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 꿈을 이룬다고 한다. 그것은 아마 하늘의 이치를 두고 한 말인 것 같다.
20년만에 자신의 개인적인 꿈을 이룬 최장옥씨. 그는 요즘 새로운 꿈을 키우고 있다. 이제 세상을 위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삶을 살자는 것이다. 지역봉사클럽 활동과 체육회 활동도 그렇게 해서 시작을 했다. 하지만 최 국장이 그중 의미를 두는 것은 시민단체 활동이다.
비록 공직에 담고 있는 몸이지만 ‘원칙과 기준이 바로 선 사회’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더불어 사는 사회를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의 몫이 있다는 생각이다. 사회에도 산소와 같은 역할을 할 곳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주위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당진참여연대에 가입해 활동하고 있다.
지난해에 군의회 행정사무감사를 감시하는 데에도 한몫을 했고 올해에는 참여연대 지역사회위원장을 맡아 당진군이 행정자치부의 서비스헌장 기준을 얼마나 잘 이행하고 있는지를 심사하는 일을 위탁받았다.
“저의 남은 꿈은 소박한 겁니다. 이 사회의 일원으로 후회없이 열심히 잘 살았다고 스스로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장옥 국장은 사망 후 자신의 장기를 사회에 기증하기로 서약도 한 상태다. 집배원으로 사회의 한쪽을 묵묵히 지탱해온 그는 우리사회의 격변기에 보았던 지식인들의 침묵이 참으로 싫고 답답했다. 그것은 무책임한 것이었다. 자고로 아는 자는 ‘예’할 것을 ‘예’하고, ‘아니오’할 것을 ‘아니오’ 해야 하는 게 아닌가.
김태숙 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