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록으로 보는 우리 역사 13
병조(兵曹)에서 도순찰사(都巡察使)의 계본(啓本)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일찍이 경상도(慶尙道) 지세포 만호(知世浦萬戶)를 혁파(革罷)하였으나, 그러나 지세포(知世浦)는 왜구(倭寇)의 첫 길목이니 방어(防禦)에 가장 긴요합니다. 청컨대 다시 세우게 하소서. 충청도(忠淸道) 당진포 만호(唐津浦萬戶)를 난지도(難知島)로 옮겨 방어하게 하였으나, 난지도는 물길이 험악(險惡)하고, 얼음이 얼면 출입하기가 더욱 어려워지니, 청컨대 당진포(唐津浦)에 돌아오게 하소서. 난지도도 또한 적이 침입하는 길이니 방수(防戍)가 없을 수 없기 때문에 이전에는 얼음이 풀릴 때에는 당진포(唐津浦)의 병선(兵船)을 나누어 방어하였습니다. 또 그 토지가 기름지니, 청컨대 당진포 만호(唐津浦萬戶)로 하여금 병선을 나누어 난지도를 방어하게 하고, 또 둔전(屯田)을 경작하여서 군수(軍需)에 보태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조 4년 - 1458년 6월 29일(음))
◆당진의 군사시설
현재 당진의 군사시설은 2개 대대병력이 상주하여 경계하고 있으나 조선시대 이전에는 확실한 내용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서서는 일정 부분, 군사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방군의 경우 육군과 수군으로 나뉘어 편재되었다. 우선 육군의 경우 충청도에는 병마절도사(종2품) 2인이 있었는데 1인은 관찰사(종2품)가 겸하여 감영에 있었으며 다른 1인은 충청병영이라 하여 해미에 있었다. 그 밑에는 첨절제사가 있었는데 목사(정3품)가 겸하였고 또한 그 아래에 각 고을의 군수, 현령이 소속되어 있었다. 당진이나 면천의 육군은 결국 군수와 현령이 담당하였는데 그 수직관계는 홍주목사를 거쳐 해미병영, 그리고 조정으로 올라간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수군의 경우는 약간 다른데 역시 충청도에는 2인의 수군절도사(정3품)가 있었다. 그 중 1인은 또한 관찰사가 겸임하였고 다른 1인의 수군절도사, 즉 수사(水使)는 충남 보령에 수영을 두고 그 곳에 있었다. 수사밑에는 우후(虞候), 첨절제사(僉節制使), 만호(萬戶) 등이 있었는데 이 수군은 육군과 달리 지방수령이 겸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결국 보령의 수영밑에는 2인의 첨절제사가 있고 그 중의 1인이 태안과 서산, 당진을 관할하였다. 당진의 경우는 당진포만호(종4품)가 있어 관리하였던 것이다. 조선시대 당진은 현으로 현감이 종6품 벼슬이니 만호의 지위가 매우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당진의 관방유적(군사유적)으로는 당진포 만호와 난지도가 나오는데 당진포 만호의 경우는 ‘당진현 서쪽 34리 지점에 있고 수군만호가 1명, 1514년(중종 9)에 석성을 쌓았는데 그 둘레가 1,340척이며 높이는 9척이다’라고 했다.
이곳은 현재의 당진포리(해창)를 말하는 것이다. 난지도의 경우는 ‘당진의 북쪽으로 바다 한가운데 있고 둘레가 34리인데 당진포 만호가 군사를 나누어 이를 지키게 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위의 기사는 「조선왕조실록」 세조 때의 사실로 당진에 관련한 내용이 있어 우리의 군사유적을 한번 살펴본 것이다.
자료조사·글 : 김남석(nsk60@hanmail.net)


